[지금가기 딱 좋은 청정 1번지 영양] <11> 조지훈과 주실마을

  • 류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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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1-23   |  발행일 2020-11-23 제11면   |  수정 2020-11-27
조지훈이 태어난 문향의 땅…문학관엔 시인의 발자취 오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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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조지훈이 태어난 영양 주실마을. 호은 조전이 처음 들어와 정착한 뒤 한양조씨 세거지가 되었다. 마을에 들어서면 조지훈의 시 '낙화'가 적힌 조형물이 보이고 그 뒤로 조지훈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가을이 숲을 지나고 있다. 느티나무, 느릅나무, 버드나무, 팽나무, 시무나무의 담홍과 노란 잎들은 어떤 후회도 없는 흡족한 모습으로 바람과 대지에 몸을 맡겼다. 잎들이 떠난 자리에 드러난 무수한 가지들은 완고하게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들은 앙상하면서도 풍성했다. 숲의 입구에는 어느 단단한 벼랑으로부터 스스로 갈라져 나온 듯한 비정형의 석비가 서 있다. 시선과 마주하는 반듯한 면에는 '주실마을'이라 새겨진 단정한 글씨가 바위의 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1. 주실마을의 한양조씨

숲을 지나면 하늘 넓은 땅이 활짝 열린다. 마을 앞에는 삼각형의 문필봉이 솟았고 마을 뒤에는 일월산에서 흘러온 3개의 완만한 봉우리가 물 위에 뜬 연꽃 같은 부용봉(芙蓉峯)이 펼쳐져 있다. 두 봉우리 사이로 장군천이 흘러 넉넉한 땅을 이루니 마을의 이름은 주곡(注谷) 또는 주실(注室)이라 한다. 주곡은 물이 쏟아지는 골짜기, 이는 글 읽는 소리 끊이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집들은 부용봉 아래에 기품 있게 앉아 문필봉을 바라보고, 앞에 펼쳐진 들은 장군천의 휘어진 몸매 그대로 부드럽게 넉넉하다.

이 땅에 원래 살던 사람들은 주씨(朱氏)라 한다. 인조 8년인 1630년경 영양읍 원당리에 살던 호은(壺隱) 조전(趙佺)이 처음 들어와 정착한 뒤 한양조씨 세거지가 되었다. 실학자들과 교류해 일찍 개화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똘똘 뭉쳐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마을이다. 이곳에서 시인 조지훈이 태어났다.

마을의 한가운데 '호은종택(壺隱宗宅)'이 자리한다. 1920년 12월3일 호은종택 중앙의 가장 좋은 방에서 시인 조지훈이 태어났다. 본명은 동탁(東卓), 3남1녀 중 2남이다. 사람들은 '조박사 집'이라 부른다. 생가의 뒤편에 시인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본가가 있다. 지훈 일가가 떠난 이후 상당 기간 폐옥으로 남아 있던 것을 2010년에 복원했다. 대문에는 '방우산장(放牛山莊)'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그는 수필 '방우산장가'에서 '방우산장은 내가 거처하고 있는 이른바 나의 집에다 스스로 붙인 집 이름'이라고 했다. 소년 동탁은 일제 하의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 조부에게서 한문을 배우고 마을의 '월록서당(月麓書堂)'에서 한학, 조선어, 수신, 역사, 도서 등을 공부했다 한다.


1630년 한양조씨 조전 마을 첫 정착
증손자 조덕린 문장과 경학 뛰어나
63인의 후손이 문집·유고 남겨 명성
시인 생가 '호은종택' 2010년 새단장
문학관 뒤 시공원에 27개 시비 세워



주실의 동쪽에 월록서당이 있다. '일월산 자락의 서당'이라는 뜻이다. 영양 최초의 서당인 영산서당이 서원으로 승격된 이후 처음 세워진 서당이었다. 주곡리의 한양조씨, 도곡리의 함양오씨(咸陽吳氏), 가곡리의 야성정씨(野性鄭氏)가 힘을 모아 영조 49년인 1773년에 건립했다. 현판 글씨는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며 기문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썼다.

입향조인 조전은 자식들의 교육에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한다. 아들과 증손자 등이 연이어 급제하면서 주실에 한양조씨의 학문적 기틀을 다지게 된다. 특히 조전의 증손자인 옥천 조덕린은 문장과 경학(經學)이 뛰어나 숙종과 영조 대에 여러 관직을 지냈다. 그는 영조 1년에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었고, 영조 12년에는 서원의 난립을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노론의 탄핵을 받고 다시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지로 향하던 길, 그는 강진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덕린의 죽음은 후손들에게 상당한 고통을 안겨 주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아들 조희당(趙喜堂)은 출사하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을 닦으며 후손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여생을 보냈다. 조덕린의 학문은 손자인 월하(月下) 조운도(趙運道), 마암(磨巖) 조진도(趙進道),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 형제가 계승했다. 형제들은 모두 향리에서 학문에 정진하여 선비의 사표로 이름을 떨쳤다.

월록서당은 조운도의 발의로 건립된 것이다. 주실의 서쪽 천변에는 조술도의 정자인 만곡정사(晩谷精舍)가 위치한다. 만곡정사의 현판 역시 78세의 노구로 주실을 찾아 왔던 채제공이 썼다. 마을의 가운데에는 조운도의 손자인 조성복(趙星復)의 정자 학파헌(鶴坡軒)이 자리한다. 조성복은 직접 농사를 지으며 가학을 이어나간 인물로 학덕을 고루 갖춘 선비였다고 한다. 학파헌 현판은 정약용의 글씨다. 평생 은거한 조성복에 대해 정약용은 그가 시대를 잘못 만났기 때문이라며 한탄했다. 가문에 홍패(대과급제증서)가 넉 장, 백패(소과급제증서)는 아홉 장에 불과했다. 그러나 63인의 후손들이 문집과 유고를 남김으로써 주실은 문한(文翰)의 땅으로 성장했다. 일제강점기 친일 문학과 사상 전환의 강요에 붓을 꺾고 지훈이 향한 곳도 고향 주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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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의 삶과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지훈문학관'. 소년 시절 즐겨 읽었던 책을 비롯해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시대를 고민한 작품까지 시인의 전 생애가 한 편의 전기처럼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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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 시공원에는 '승무' '낙화' '다부원에서' 등 27개의 시비와 청동조각상들이 어우러져 있고 그 가운데 시인의 동상이 서 있다.

#2. 조지훈 문학관

호은종택과 월록서당 사이에 지훈의 문학관이 있다. 정면 열두 칸의 긴 한옥 건물로 2007년 5월 개관했다. '지훈문학관(芝薰文學館)' 현판은 부인 김난희 여사가 쓴 것이라 한다. 소년 동탁이 읽었다는 '피터 팬' '파랑새' '행복한 왕자' 등의 동화들이 놓여 있다.

책 읽던 소년은 9세 때부터 글을 썼고, 그의 형 세림과 함께 마을 소년들의 모임인 '꽃탑회'를 조직해 동인지 '꽃탑'을 펴내기도 했다. 이어지는 청록시절 '문장'지에 추천을 받았던 20대, 고문, 절필, 그리고 광복. 문학 소년은 문학청년으로 커져 있다. 곧이어 전쟁의 시편들, 산문과 학술연구들, 추상같은 비평과 선언들이 있다. 커다란 벽에서 '지조론'을 마주한다. 1950년 말 과거의 친일파들은 뉘우침 없이 정치 일선에 나왔고, 지도자들은 상황에 따라 변절을 일삼았다. '지조론'은 그러한 세태를 냉정한 지성으로 비판한다.

그의 유품들도 남아 있다. 평소 썼던 문갑과 가방, 30대 중반에 쓴 검은색 모자와 가죽 장갑, 40대에 사용했다는 부채, 외출할 때 즐겨 입었던 외투와 삼베 바지, 그리고 세상을 뜨기 6~7년 전부터 애용했다는 담배 파이프와 안경 등. 벽에 그 생의 조각들이 100여 장의 사진으로 걸려 있다. 곁에 마련된 헤드폰을 써 본다. 선생이 여동생과 함께 시 '낙화'를 들려준다. 병색 짙은 음성이 말한다.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문학관 뒤 산자락을 타고 산책로가 이어진다. 길섶에는 시비들이 늘어서 있다. 산책로는 세 개의 봉우리 중 가운데 봉우리의 기슭에 닿는다. 그곳에는 지훈 시공원이 있다. '승무' '낙화' '다부원에서' 등 27개의 시비와 청동조각상들이 어우러져 있고 그 가운데 시인의 동상이 서 있다. 그는 1968년 5월19일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단풍나무 붉은 잎이 난다. 이제 '다친 발길이 아물어 꽃잎에 스치는 날'(빛을 찾아가는 길 中)이라 할 수 있나.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영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조지훈 문학관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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