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정신, 청도에서 꽃피우다 .4] 화랑정신에서 비롯된 새마을정신

  •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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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1-25   |  발행일 2020-11-25 제22면   |  수정 2020-11-27
신도리서 깃발 올린 '하면 된다' '잘살아 보세'…그 뿌리는 화랑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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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신도리에 조성된 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공원 새마을상징마당. 마을 가꾸기에 나선 신도리 주민들의 모습을 재현한 동상과 새마을운동 당시 모습을 볼 수 있는 사진이 전시돼 있다.

경북 청도에 뿌리를 둔 화랑정신은 한 시대에만 머물지 않았다. 시기와 지역의 경계를 넘어 모두가 공유하는 시대정신으로 승화돼 이어졌다. 근대에 들어서는 새마을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돼 되살아났다. 새마을운동은 '잘사는 농촌'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체념과 패배의식을 뿌리 뽑고 국민 의식을 일깨운 정신운동이나 다름없었다. '하면 된다'는 신념과 '잘살아 보자'는 공동의 목표는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고, 경제대국으로 갈 수 있는 성장동력이었다. 그 중심에 청도가 있었다.

#1. 신도리에서 멈춰 선 대통령 전용열차

1969년 8월. 넋 나간 한숨이 토해졌다. 예상치 못한 폭우는 전국의 농촌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미처 손 쓸 틈도 없었다. 길은 끊어지고 둑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범람한 물은 쓰레기와 뒤섞였고 순식간에 농작물을 삼켰다.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키우던 가축들은 진흙더미에 깔려 거친 숨을 헐떡였다.

'어떻게 살라고….'

남은 것은 절망뿐이었다. '비탄'과 '허탈감'이 전국의 농촌마을을 헤집고 다녔다. 원망 섞인 탄식은 암세포처럼 마을과 마을 사이로 전이됐다. 전이된 원망은 급기야 절망이 됐다. 어렵게 복구에 나섰지만 희망은 좀체 보이지 않았다. 변변한 농기계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수마가 할퀸 아비규환의 현장을, 사람의 힘으로 감당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해 보였다. 비보는 연일 들려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임자, 열차 대기시켜. 피해가 큰 경남지역으로 가봐야겠어."

전용열차가 요란한 굉음과 함께 레일 위를 미끄러졌다. 열차 밖을 보는 박 대통령의 머릿속은 복잡한 실타래처럼 꼬이기만 했다.


수해현장 시찰가던 박정희 전 대통령
말끔히 단장된 신도리 보고 열차 세워
농로 확장·지붕 개량 등 눈으로 확인
1970년 지방장관회의서 직접 소개
새마을운동 전국 확산 신호탄 올려


'어떻게 하면 우리 농촌이 잘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서든 빈곤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고민은 깊어갔지만 뾰족한 답은 없었다. 박 대통령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때였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가 본 차창 밖 풍경은 여느 농촌과는 달랐다. 산은 울창했고 마을은 단정하게 산 아래에 자리해 있었다. 수마가 할퀸 상처도 좀체 찾을 수 없었다.

"임자, 기차 세워!"

박 대통령이 소리치듯 입을 열었다. 수행원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뭐 좀 봐야겠어"

전용열차는 서서히 멈춰섰다.

"여기가 어디야?"

느닷없는 질문에 모두가 멈칫했다.

"청도군 신도리라는 곳입니다."

열차가 선 곳은 청도의 한 작은마을, 신도리였다. 경부선 철로변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신도리 역시 수해를 입었지만 그 모습은 사뭇 달랐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힘을 모아 제방과 마을 안길을 보수하고 있었다. 헐벗은 여느 농촌마을과는 달리 뒷산엔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마을 안길은 시원스럽게 닦여 우마차가 다니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개량 지붕으로 말끔하게 단장된 집은 마치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새색시처럼 고와 보였다. 변변한 길조차 없는 다른 마을과는 확연히 달랐다. 박 대통령이 그토록 그리던 바로 그런 농촌이었다.

"기왕 마을을 복구할 바에야 좀 더 잘 가꿔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보자고 마을 총회에서 결의를 했습니다. 모두가 하나 같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모았다.

박 대통령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짧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농촌이 잘살려면 의식부터 바꿔 농민들 스스로가 일어서야 한다. 그 토대를 정부가 만들어주고 지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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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군 신도리 전경. 1970년 4월22일 신도리를 모델로 마을 가꾸기 사업을 시작하면서 새마을운동이 본격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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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신도리 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공원 내에 있는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 새마을운동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2. 새마을운동, 신도리에서 시작되다

경남 수해현장 시찰을 가던 중 본 신도리는 이후 새마을운동의 마중물이 되었다. 그날 이후 박 대통령의 농촌 개발 구상은 신도리에서 구체화됐다. 당시 한국 농촌은 빈곤의 악순환에 허덕이고 있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공적으로 추진되고 있던 1960년대 말에도 농촌의 환경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농민들은 '해보겠다'는 의지 자체가 없었다.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못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의식이 문제였다.

청도 신도리는 달랐다. 농촌환경 개선사업을 1957년부터 이미 시작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농가소득 증대를 위해 길을 먼저 넓혀 나갔다. 농로를 넓히고 지붕을 개량하고 부엌과 화장실을 고쳤다. 경부선 철로에 신기역을 건립해 역사를 개통하기도 했다. 특히 노는 사람, 술독에 빠진 사람, 노름하는 사람이 없는 '3無 마을'로 협동심이 유달리 강했다. 모두가 '잘살아 보자'는 굳은 의지로 한마음이 되었다. '하면 된다'는 신념이 신도리 주민 마음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청도 신도리 방문 8개월 후인 1970년 4월22일, 박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의 원형이 된 '새마을 가꾸기 사업'을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제창했다. 이 자리에서 청도 신도리 사례를 직접 소개하면서 자신의 구상을 피력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5천년 묵은 가난을 몰아내도록 그들의 의욕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먼저 농촌의 생활환경을 바꾸는 '새마을 가꾸기 사업'부터 벌여보도록 합시다."

경북 청도가 '새마을운동의 발상지'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면 된다'는 새마을정신은 신도리 주민 사이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었고, 그 정신은 청도에서 꽃피운 화랑정신에서 승화된 신념이었다.

글=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청도군지. 디지털청도문화대전. 경북독립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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