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가기 딱 좋은 청정 1번지 영양] <13> 소설가 이문열과 두들마을

  • 류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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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2-07   |  발행일 2020-12-07 제11면   |  수정 2020-12-07
380년 역사 간직한 이문열의 고향…작품 곳곳에 자부심으로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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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문열이 2001년 두들마을에 지은 광산문학연구소. 그는 '녹동고가 광고신택'이라는 현판을 단 이곳을 '자신의 집이면서 개인 창작실이고 후배를 위한 소설 사랑방 같은 공간'이라고 이야기한다. 경내에는 학사, 강당, 사랑채, 서재, 대청, 식당, 정자 등이 'ㅁ'자로 들어서 있다.

매화나무 꽃이라는 화매천(花梅川) 변에 두두룩하게 언덕진 땅이 있다. 그래서 언덕을 뜻하는 우리말로 '두들'이라 했다. 그 땅의 동쪽에는 병암산(屛岩山)이 서 있다. 철마다 갖가지 꽃들이 피어나고 산 정상에는 열 그루의 노송이 굼실굼실 솟았다. 병암산은 가슴에 기암괴석을 둘러 두들에서 바라보면 병풍을 펼친 듯하다. 두들의 뒤에는 광로산(匡蘆山)이 일월산의 낙맥으로 내려서며 초야를 이루고 있다. 두들은 소설가 이문열의 고향이다. 그의 작품 곳곳에서 두들은 깊은 자부심으로 묘사된다. 넓고 위엄 있는 영지, 아름드리 참나무 오솔길, 느닷없는 충격으로 다가오는 덩그런 기와집 등. 이는 오늘 우리 앞에 펼쳐지는 두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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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고향 두들마을. 나뭇가지들이 한옥의 부드러운 용마루 곡선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두들마을은 이문열의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의 역정이 펼쳐지던 무대이기도 하다.

#1. 두들마을

두들마을을 개척한 이는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이다. 그는 인조 18년인 1640년 병자호란의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의 부인은 안동장씨 장계향으로 최초의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집필한 여중군자로 이름 높다. 석계 부부는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도토리를 얻을 수 있는 상수리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그리고 왜란과 호란으로 궁핍해진 이웃들에게 도토리 죽을 끓여 나누었다고 전한다. 두들마을에는 지금도 상수리나무가 많다. 수령 370년이 넘는 고목은 모두 50여 그루에 이른다.

석계의 선업을 이은 이는 넷째아들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이다. 이후 후손들이 더해져 두들마을은 재령이씨(載寧李氏) 집성촌으로 이어져 왔다. 마을에서는 많은 학자와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는데, 조선시대 퇴계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킨 갈암 이현일과 밀암 이재, 근세에 의병대장을 지낸 나산 이현규, 일제강점기 유림 대표로 파리장서사건에 서명한 운서 이돈호, 이명호, 이상호 등의 독립운동가와 항일 시인인 이병각, 이병철 등이 두들 출신이다. 현대의 소설가 이문열은 항재의 12세손이다.


석계 이시명이 1640년에 마을 개척
부인은 '음식디미방' 집필한 장계향
학자 이현일·의병장 이현규 등 배출

소설가 이문열 석간고택서 어린시절
작품속 인물 삶의 무대로 자주 등장
2001년 광산문학연구소 짓고 책 보내



마을 앞에는 화매천이 흐른다. 천변에는 수백 년을 넘긴 참나무 고목이 군락을 이루고, 절벽에는 석계가 짓고 항재가 새겼다는 동대, 서대, 낙기대, 세심대 등의 글씨가 남아 있다. 이 중 낙기대와 세심대는 30여 리 전방의 촌락과 산야를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몸과 마음이 상쾌해져 배고픔을 잊고 마음을 씻을 수 있다는 뜻에서 이름 지어졌다. 이곳 낙기대에서 보릿고개로 힘든 주민들에게 구휼식량을 나누었다고 전한다. 정부인 안동장씨 시절부터 시작된 이러한 전통은 광복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마을에는 석계의 유적인 석천서당과 석계고택, 작가 이문열이 유년시절을 보냈다는 석간고택 등이 남아 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선 음식디미방 체험관과 장계향 예절관, 그리고 이문열의 집이자 문학연구소 등이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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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문학연구소 옆에는 한옥 북카페 '두들책사랑'이 있다. 이문열의 작품은 물론 두들마을 출신 문인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2. 이문열의 집 '녹동고가 광고신택'

이문열은 2001년 두들마을에 자신의 집이자 사랑방인 '광산문학연구소'를 짓고 '광산문우(匡山文宇)'라 현판을 달았다. 경내에는 학사, 강당, 사랑채, 서재, 대청, 식당, 정자 등이 'ㅁ'자로 들어서 있다. 꽤 큰 규모다. 그의 거처는 경기도 이천의 '부악문원(負岳文院)'이다. 부악문원은 그의 집필실이자 살림집이기도 하고, 작가지망생과 문학연구자, 국내외 번역가 등이 머물며 문학 활동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는 고향 땅에 연구소를 지은 후 장서 2만여 권을 내려 보냈다 한다. 언젠가 귀향할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때가 종심(從心) 때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는 이곳을 지을 때 일면 서원(書院)을 염두에 두었다 한다. 늙어가면서 젊은 친구들과 함께 글을 이야기하는 공간, 서로 주고받는 강학(講學)의 공간, 내가 더 많이 공부하는 집(宇)이 되길 바랐다고 한다.

2018년 그는 '광산문우'의 현판을 내렸다. 그 자리에는 '녹동고가 광고신택(鹿洞古家 廣皐新宅)'이라는 새 현판을 걸었다. 새 이름의 깊은 의미나 작가의 심사는 알 도리가 없다. 긴 돌담 속에 큰 대문간, 그 속에 작은 대문이 열려 있다. 대문 속으로 단 낮은 집필실의 오른쪽 가장자리와 단 높은 강당의 왼쪽 가장자리가 한 칸 통로를 사이에 두고 나란하다. 통로 앞에는 짧은 담이 서 있어 이어질 것 같은 걸음을 슬쩍 감춘다. 어쩐지 그 짧은 담 앞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자글거리는 마당만 저회하다 돌아 선다.

#3. 두들광장에 올라

마을의 가장 위쪽에는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 가장자리를 따라 조성돼 있는 산책로는 참나무 숲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광장을 '도토리공원'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상수리나무 가지들이 단아한 한옥의 부드러운 용마루 곡선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문열은 자전적 소설 '변경'에서 열일곱 인철의 회상을 통해 고향 두들을 이야기한다. 그에게 두들은 '감동'이기도 하고 '감옥'이기도 했으며, '실패의 예감을 자아내던 황무지'이기도 했고 '비옥함과 다사성을 감추고 있는 한 넓고 위엄 있는 영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름드리 참나무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언덕에 오르자 상상 속에서나 그려보았던 덩그런 기와집들이 잇따라 나타나 이미 도회적인 안목으로 내게 느닷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거기다가 그 뒤 사흘 고향에 머물면서 들은 자기 옛 고향의 영광은 그것을 한때의 충격에서 깊은 감동으로 키워 마침내는 뒷날의 내 의식에까지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소설 변경 中)고도 했다.

두들마을은 이문열의 작품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소설 '선택'에서 두들은 직접적인 배경 장소다. '그해 겨울' '금시조' '황제를 위하여' 등에서는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의 역정이 펼쳐지던 무대이기도 하다.

경기도 이천에 있는 그의 집필실 벽에는 고향집을 스케치한 액자가 걸려 있다고 한다. 연작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에서는 고향과 문중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한다. '풍화된 화강암 언덕 위에 서식하던 참나무붙이가 당당하던 시절, 늘어선 수십 칸 고가들이 그림처럼 서 있고, 그 한 곳 서당 대청에서는 낭랑한 강 소리가 울려 퍼지던 시절, 몇 년마다 한 번씩 문중 출신의 현관들이 임금의 하사품을 실은 나귀와 종복들을 앞세우고 퇴관해 오고, 가을이면 인근 소작지의 아름드리 거둔 나락바리를 인도해 분주하게 그 언덕을 오르내리던 시절'이 있었다고. 향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러나 저기를 보라. 광고신택, 넓은 언덕의 새로운 집을. 고요히 당당하지 않나.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영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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