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광기와 우연의 역사…역사를 결정 지은 '우연의 순간'

  • 노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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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2-18   |  발행일 2020-12-18 제13면   |  수정 2020-12-18
상관의 명령 받들어서 나폴레옹에게 패배 안겨 준 그루쉬
독재와 권력 다툼 속에서 죽음을 마주한 키케로 이야기 등
심리학적으로 생생히 파고든 역사 속 인물의 특별한 한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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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케로의 죽음. 프랑수아 페리에(1635) <이화북스 제공>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에게는 '최고의 이야기꾼'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저자와 가까이서 대화하는 느낌이 들곤 한다. 가끔 글 속에 암호처럼 숨어 있는 자기반성적 고백이나 날카로운 비판을 발견하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시대와 공간, 그리고 언어의 차이를 초월한 이상한 마력 같은 것이 그의 글에 있는 것 같다.

츠바이크는 특히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역사적 인물의 일대기를 마치 '지금 살아있는 사람'처럼 면밀하고도 생생하게 묘사해내는데 탁월하다. 인물의 심리 묘사에 뛰어난 그의 스타일은 그래서 전기(傳記) 작품들에서 빛을 발한다.

츠바이크는 '잘난 인물이건, 못나고 비겁한 인물이건' '승자든, 패자든' 역사 속 인물의 한순간을 포착해 그 행적과 심리까지 해부해버리곤 한다.

그의 손에 쓰인 인물 중 하나가 바로 프랑스의 정치가 조제프 푸셰(1759~1820)다. 푸셰의 전기에서 츠바이크는 평생 기회주의적인 삶을 살았던 한 정치인의 초상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츠바이크의 꼼꼼한 서술 속 푸셰의 모습은 한없이 정략적이고 기회주의적 삶을 살아가는 오늘날 이 나라 일부 정치인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츠바이크(광기와우연)_표지입체(201123)[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이화북스/ 388쪽/ 1만6천500원

이번에 최신 완역판으로 국내에 소개된 '광기와 우연의 역사'도 전기작가 츠바이크의 스타일이 잘 살아 있는 책이다. 책에는 역사적 인물의 특별한 한때를 다룬 14편의 글이 에피소드 형식으로 실려있다.

'키케로의 죽음과 로마 공화국의 종말' '동로마 제국의 종말' '불멸을 향해 질주하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의 부활' '하루살이 천재의 비극' '세계사를 결정지은 워털루 전투' '괴테의 마지막 사랑' '황금의 땅 엘도라도의 저주' '죽음을 경험한 예술가' '미국과 유럽을 잇는 해저 케이블' '톨스토이의 마지막 날들' '남극 정복을 둘러싼 경쟁' '봉인 열차' '윌슨의 좌절' 등의 제목으로 기원전 1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있었던 일들을 다룬다.

키케로, 메흐메트 2세, 나폴레옹, 헨델, 괴테,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레닌, 윌슨 등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일대기가 아닌 '결정적 순간'들에 초점을 둔다.

특정 인물의 영웅적인 면만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추악하고 때로는 나약해 보이는 면들도 낱낱이 보여준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패배자들에 대한 강조도 잊지 않는다.

책은 제목처럼 역사 속 '광기'와 '우연'의 순간들을 포착, 그때로 시간여행을 한다. 인류의 역사는 그런 '광기'와 '우연'에 운명이 결정되곤 했다는 설명과 함께.

우선 츠바이크는 첫 장에서 로마 공화국의 상징적인 인물인 키케로의 한순간을 소개한다. 공화정을 수호했던 키케로가 독재와 권력다툼을 마주하고 고뇌하는 모습과 목숨을 잃기까지의 상황을 그린다. 군데군데 법과 정의,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정의와 법, 이 둘만이 국가를 든든히 떠받치는 기둥이 돼야 한다. 선동가가 아니라 정직한 자들이 국가에서 권력을 잡고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그 누구도 자신의 개인적 의지를 민중에게 강요하며 횡포를 부려서는 안된다. 명예욕에 사로잡힌 사람이 민중에게서 통치권을 강탈한다면 누구나 그 사람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할 의무가 있다."(24쪽)

태평양을 발견한 발보아를 서술하면서 약탈과 살인으로 얼룩진 서구의 식민지 개척 역사를 보여준다.

또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를 우연히 작곡한 루제 드 릴의 에피소드, 최악의 상황에서 '메시아'를 작곡해 낸 헨델의 이야기, 상관의 명령을 받들어 나폴레옹에게 패배를 안겨준 그루쉬의 이야기 등 문학적 상상력과 심리학적 통찰력이 담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소개된다.

츠바이크는 서문에서 "나는 이 자리에서 여러 시대와 다채로운 영역에서 추려낸 몇 개의 별처럼 빛나는 순간들을 기억해보려 한다. 내가 이렇게 이름 붙인 이유는 이러한 순간들이 부질없이 지나간 세월 속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영원히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역사는 저 숭고한 순간들을 완성된 형태로 내어놓았기에 첨삭이 필요하지 않다. 역사가 진정 시인이자 극작가로 활약하고 있는데 어찌 감히 일개 시인이 역사를 이기려고 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처럼 역사 속 '결정적인 한순간'이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의 역사를 결정지어 왔다는 게 츠바이크의 지론이다. 그것이 자랑스러운 역사든, 흑역사든.

결정적이고 반짝이는 역사적 순간에 인간은 도덕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고, 부끄럽고 탐욕스러운 선택을 하기도 한다. 영원히 각인된 별이라고 해서 다 같은 별은 아니라는 말이다. 때로는 예술가의 일생에 결정적인 한순간이 찾아와 불멸의 작품 탄생으로 이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작가는 그 순간들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코로나19를 필두로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올 한 해는 츠바이크의 말대로 '억겁의 시간이 태평하게 흐르던 중 찾아온 참으로 역사적인 순간'일지 모른다. 아흔 살 노인도 "올해 참 유별났다"고 할 정도이니 말이다.

먼 훗날 쓰일 '21세기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 '2020년 대한민국'은 어떻게 기록될까. 누가 부끄러운 승리자로, 또 누가 우월한 패배자로 다뤄질까. 미래의 츠바이크가 펜을 들고 지금의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감염병과 진영 논리가 세상을 혼란케 해도 매 순간 역사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할 이유다.

노진실기자 know@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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