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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콘텐츠가 SF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소재 고갈로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이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새롭고 재밌는 것을 향해 과학·기술·판타지 영역을 아우르는 SF서사물이 등장하고 있다. 창작자와 수요자의 욕망, 급변하는 시장의 상황 변화와 맞아떨어진 결과다. 특히 최근 몇 년간에 걸쳐 진행된 국내 SF장르물에 대한 대중의 눈높이 변화와 선호도 증가는 OTT의 대중화로 인해 급물살을 탔다. 이 가운데 제작비가 각각 400억원, 240억원에 달하는 '외계인'과 '승리호' 같이 대작 SF 영화가 기획·제작된 건 눈여겨볼 만하다.
특수효과는 이미 세계 수준
막대한 제작비용·기술 등 여건 충분
흥행·성장 지속 관건은 시장의 규모
SF는 문화장벽 상쇄하는 글로벌 IP
일부영화 극장 아닌 넷플릭스행 택해
◆관건은 기술이 아닌 시장 규모
한국에서 SF를 만드는 게 여의치 않던 시절이 있었다. 무한 상상력이 바탕이 된 만큼 이를 감당할 기술과 자본이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았고, 적어도 한국에서 SF는 개척되지 않은 새로운 길이라는 점에서 동기부여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참신한 이야기만 있다면 SF장르 제작을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최근 시공간을 초월하는 재난·SF·사극 등 VFX(시각특수효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대작 장르물이 부쩍 늘어난 건 그만큼 충분한 제작여건을 갖추고 있음을 방증한다. 한 투자·배급사 관계자는 "과거와 달리 국내 CG 기술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SF장르이기 때문에 투자를 주저할 이유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기술의 진보와 새로운 장르 개척 때문에서라도 SF 제작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이는 많은 국내 VFX 업체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신과함께' '백두산' 등을 제작한 VFX 및 콘텐츠 전문기업 덱스터 스튜디오를 필두로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영화 '부산행' 등의 VFX를 맡은 투썬디지털아이디어, 영화 '관상' '악질경찰'의 VFX를 작업한 매그논 스튜디오, 그리고 포스크리에이티브파티, 모팩, 매크로그래프, 위지윅 스튜디오 등이 자체 연구소나 랩을 갖추며 국내 VFX 제작의 튼튼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덱스터 스튜디오 김용화 감독 겸 대표는 "기술의 진보로 표현의 한계가 사라진 작금의 상황에서 SF의 이야기나 감정의 측면은 다른 장르와 다르지 않다. 다만 SF는 극장에서 체험할 때 감상이 극대화되는 장르이고 영화감독으로선 그런 점 때문에 SF를 더 갈망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관건은 시장의 규모다. SF는 다른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작비가 많이 들 수밖에 없는 구조라 지금처럼 극장 개봉이 불확실하고 관객 수 감소로 리스크를 안고 있는 상황이라면 기획 논의조차 힘들 수 있다. 하지만 SF장르는 문화의 장벽을 상쇄할 수 있는 글로벌 IP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승리호'가 극장이 아닌 넷플릭스 공개를 결정한 것도 글로벌 IP로서의 매력과 영속성을 고려한 작품이라는 점도 반영됐다.
할리우드의 전유물처럼 여겼던 SF가 국내 콘텐츠 시장에서 주류 장르로 부상했다는 건 어쨌든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비단 영화계에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다. 영화와 드라마, OTT의 크로스오버 프로젝트인 'SF8'의 경우처럼 SF장르에 대한 편견을 깨는 신선한 시도들이 앞으로도 계속 생겨날 수 있다. 스펙터클과 화려한 비주얼로 사유할 수밖에 없는 SF장르를 한국을 중심으로 더 대담하고 흥미로운 SF적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는 얘기다.
내년 굵직한 SF영화 '러시'
미래세계 다루지만 결국 우리의 현실
자연스럽고 친숙한 장르로 다가올 듯
최초 SF블록버스터 '승리호' 등 대기
무한상상력으로 韓 콘텐츠 가치 확장
◆SF 상상력, 한국 콘텐츠의 가치를 높이다
SF는 미래의 기술과 세계관을 빌리지만 결국 우리의 현실을 이야기한다. 그만큼 자연스럽고 친숙한 장르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올해 SF시대의 본격적인 서막을 알릴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영화 '서복'과 '승리호'의 공개가 미뤄지면서 2021년 개봉을 예정했던 영화들과 함께 내년에는 SF장르가 대거 관객을 찾아올 예정이다. 먼저 '승리호'는 산소마스크와 고글이 없으면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황폐화된 2092년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우주쓰레기 청소선 승리호의 선원들이 대량 살상 무기로 알려진 인간형 로봇 도로시를 발견한 후 위험한 거래에 뛰어드는 이야기다. 송중기·김태리·진선규·유해진 등이 출연한 이 작품은 한국인 캐릭터들이 우주에서 활약하는 최초의 SF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건축학개론'의 이용주 감독은 8년 만의 차기작으로 복제인간을 소재로 한 '서복'을 선보인다. 박보검이 비밀리에 개발된 인류 최초의 복제인간 역을 맡았고, 공유가 복제인간을 지켜야 하는 정보국 요원을 연기한다. '도둑들' '타짜'의 최동훈 감독은 외계인을 소재로 한 SF 범죄물 '외계인'을 촬영 중이다. 류준열·김태리·김우빈·소지섭 등이 출연한다. '만추' '가족의 탄생'의 김태용 감독이 연출을 맡은 '원더랜드'는 죽음으로 소중한 이를 떠나보낸 이와 AI로 복원된 망자가 영상통화로 다시 만나는 이야기다. 박보검·수지·공유·최우식·정유미·탕웨이 등이 출연한다.
배우 정우성이 제작자로 참여한 '고요의 바다'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제작 중이다. 황폐해진 미래의 지구를 배경으로 달에 버려진 연구기지에 의문의 샘플을 회수하러 가는 정예 대원들의 이야기로 배두나·공유·이준 등이 호흡을 맞췄다. '신과 함께' 시리즈의 김용화 감독 또한 우주에 홀로 남겨진 남자를 무사히 귀환시키는 내용의 SF영화 '더 문'의 시나리오 작업에 한창이다. 이와 함께 한국 CG의 저력과 서사의 탄탄함을 전 세계에 과시한 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홈' '킹덤' 같은 괴수와 좀비물도 SF 인접 장르로 꾸준한 사랑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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