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의 연필의 무게 걸음의 무게] 시인 기형도(1960~1989)…스물아홉 짧은 생, 잊히지 않는 처절하고 아름다운 울림

  • 유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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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2-05   |  발행일 2021-02-05 제38면   |  수정 2021-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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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운 나이의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 가슴에 깊은 상흔이 패인 소년은 이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미발표, 연도 미상으로 새로 발견된 이 시는 어려서부터 상장을 라면 상자에 담을 정도로 많이 받았다는 조숙한 소년 기형도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누이에게만 보낸 눈물 흥건한 조사(弔辭)였을 터.

시인 기형도는 1960년 경기도 연평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989년 3월7일 새벽 3시30분쯤 서울 종로2가 부근의 한 극장에서 죽었다. 스물아홉 짧은 생애였다. 몇 달 후 '입 속의 검은 잎' 이란 제목으로 유고시집이 나왔다. 시집은 이후의 산문집과 더불어 '그 춥고 큰 방에서 혼자 울고 있는 서기(書記)!'가 쓴 것 같은 시편들로 우울한 유년과 부조리한 체험의 기억들을 기이하면서도 따뜻하고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시공간 속에 펼쳐낸다는 평을 받는다.

시집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불의의 사고로 죽은 누이에 깊은 상흔
눈물 흥건하게 詩 쓰며 보낸 '제망매가'
우울한 유년과 부조리한 체험의 기억
내적 상처 반성·분석…보편적 의미 부여

중앙일보 기자로 지내며 작품도 발표
서울 종로의 한 극장에서 쓸쓸한 마침

6·25를 만난 아버지는 고향 황해도 벽성군이 건너다 보이는 연평도로 피란 와 면사무소 직원으로 정착했다. 3남4녀 중 막내인 기형도가 태어난 뒤 아버지는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로 이사해 마을 개발에 앞장서고 집을 짓는 등 유복한 생활을 영위하다 1969년 중풍으로 쓰러진다. 얼마 없던 전답은 아버지의 약값으로 넘어가고 어머니가 생계 일선에 나서는 등 곤궁에 처한다. 빈방의 서늘한 윗목 같던 그때를 시인은 이렇게 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홀로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 걱정' 전문

늘 최상위권 성적이었던 소년 기형도는 신림중·중앙고를 졸업하고 1979년 연세대 정법대 정법계열로 입학, 문학 서클 '연세문학회'에서 습작을 하게 된다. 이듬해 정외과로 진학하지만 '80년의 봄' 철야 농성과 시위에 가담, 교내지에 당시를 풍자한 '노마네 마을의 개'를 기고해 형사에게 조사를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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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방위로 안양 인근 부대에서 근무, 다시 복학한 그해 12월 시 '식목제'로 교내 신문 '연세 춘추'에서 제정, 시상하는 '윤동주문학상'에 당선되고 신춘문예 최종심에도 오르내린다. 1984년 10월 중앙일보사 입사, 1985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된다.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사에서는 수습 후 정치부로 배속되었다가 이듬해 문화부로 옮겨 문학과 출판 담당으로 관련 인사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지속적으로 자신의 작품도 발표한다.

짧은 생애에 남긴 많지 않은 그의 글은 남아있는 자들에게 결코 잊히지 않는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울림 같다. 문학평론가 고(故) 김현은 기형도의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 해설에서 '좋은 시인은 그의 개인적, 내적 상처를 반성, 분석하여 그것에 보편적인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라 했다. 적확한 말이다. 독자 중의 한 사람인 나는 그의 짧은 시조차 한 번에 다 읽지 못 하고 끊어 읽을 만큼 집요한 보편성에 시달리니 말이다.

1987년 여름 유럽을 여행하고, 이듬해 여름휴가 동안 대구와 전남 등지로 여행하면서 산문 '짧은 여행의 기록'을 썼다. 문화부에서 편집부로 옮겼다.(시간적 여유가 좀 있었던지 이 해는 발표작이 좀 많았다.) 1986년 온 나라가 올림픽 열풍에 휩싸였을 때 썼을 시 '조치원(鳥致院)'은 젊었으나 자신도 모를 죽음을 앞둔 자가 미리 내려 간 '내부의 유배지'처럼 여겨진다.

사내가 달걀을 하나 건넨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1시쯤에/ 열차는 대전에서 진눈깨비를 만날 것이다./ 스팀 장치가 엉망인 까닭에/ 마스크를 낀 승객 몇몇이 젖은 담배 필터 같은/ 기침 몇 개를 뱉아내고/ 쉽게 잠이 오지 않는 축축한 의식 속으로/ 실내등의 어두운 불빛들은 잠깐씩 꺼지곤 하였다.// 서울에서 아주 떠나는 기분 이해합니까?/ 고향으로 가시는 길인가보죠./ 이번엔, 진짜, 낙향입니다./ 달걀 껍질을 벗기다가 손끝을 다친 듯/ 사내는 잠시 말이 없다./ 조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죠. 서울 생활이란/ 내 삶에 있어서 하찮은 문장 위에 찍힌/ 방점과도 같은 것이었어요./ 조치원도 꽤 큰 도회지 아닙니까?/ 서울은 내 둥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지방 사람들이 더욱 난폭한 것은 당연하죠.// 어두운 차창 밖에는 공중에 뜬 생선 가시처럼/ 놀란 듯 새하얗게 서 있는 겨울나무들./ 한때 새들을 날려 보냈던 기억의 가지들을 위하여/ 어느 계절까지 힘겹게 손을 들고 있는가./ 간이역에서 속도를 늦추는 열차의 작은 진동에도/ 소스라쳐 깨어나는 사람들. 소지품마냥 펼쳐 보이는/ 의심 많은 눈빛이 다시 감기고/ 좀 더 편안한 생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투리처럼 몸을 뒤척이는 남자들./ 발 밑에는 몹쓸 꿈들이 빵봉지 몇 개로 뒹굴곤 하였다.// 그러나 서울은 좋은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르쳐주니까요. 덕분에 저는/ 도둑질 말고는 다 해보았답니다./ 조치원까지 사내는 말이 없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무엇일까. 그의 마지막 귀향은/ 이것이 몇 번째일까, 나는 고개를 흔든다./ 나의 졸음은 질 나쁜 성냥처럼 금방 꺼져버린다.// 설령 사내를 며칠 후 서울 어느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한들 어떠랴. 누구에게나 겨울을 위하여 한 개쯤의 외투는 갖고 있는 것.// 사내는 작은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견고한 지퍼의 모습으로/ 그의 입은 가지런한 이빨을 단 한 번 열어보인다./ 플랫폼 쪽으로 걸어가던 사내가/ 마주 걸어오던 몇몇 청년들과 부딪친다./ 어떤 결의를 애써 감출 때 그렇듯이/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인다./ 조치원이라 쓴 네온 간판 밑을 사내가 통과하고 있다./ 나는 그때 크고 검은 한 마리 새를 본다. 틀림없이/ 사내는 땅 위를 천천히 날고 있다. 시간은 0시./ 눈이 내린다. -(기형도 '조치원(鳥致院)' 전문)

1989년 3월7일 새벽, 서울 종로의 한 심야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뇌졸중, 만 29세 생일을 엿새 앞두고 있었다. 그의 죽음을 김훈은 원효가 사복의 어미를 위해 부른 게송의 어조로 읊었다.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생사를 거듭하지 말아라. 인간으로든 축생으로든 다시는 삶을 받지 말아라. 썩어서 공(空)이 되거라. 네가 간 그곳은 어떠냐. … 누런 해가 돋고 흰 달이 뜨더냐.' 시인

가을 무덤

제망매가(祭亡妹歌)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철철 술을 부어주랴// 시리도록 허연/ 이 영하(零下)의 가을에/ 망초꽃 이불 곱게 덮고/ 웬 잠이 그리도 길더냐.// 풀씨마저 피해 날으는/ 푸석이는 이 자리에/ 빛바랜 단발머리로 누워 있느냐// 헝클어진 가슴 몇 조각을 꺼내어/ 껄끄러운 네 뼈다귀와 악수를 하면/ 딱딱 부딪히는 이빨 새로/ 어머님이 물려주신 푸른 피가 배어 나온다.// 물구덩이 요란한 빗줄기 속/ 구정물 개울을 뛰어 건널 때/ 왜라서 그리도 숟가락 움켜쥐고/ 눈물보다 찝찔한 설움을 빨았더냐.// 아침은 항상 우리 뒤켠에서 솟아났고/ 맨발로도 아프지 않던 산길에는/ 버려진 개암, 도토리, 반쯤 씹힌 칡,/ 질척이는 뜨물 속의 밥덩이처럼/ 부딪치며 하구(河口)로 떠내려갔음에랴.// 우리는/ 신경(神經)을 앓는 중풍병자(中風病者)로 태어나/ 전신(全身)에 땀방울을 비늘로 달고/ 쉰 목소리로 어둠과 싸웠음에랴.// 편안히 누운/ 내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술을 부으면/ 눈물처럼 튀어오르는 술방울이/ 이 못난 영혼을 휘감고/ 온몸을 뒤흔드는 것이 어인 까닭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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