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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구운 빵과 브런치 메뉴를 선보이고 있는 베이커리 카페 '벨빌베이크하우스' 윤현석(왼쪽)·서용석 대표. 프랜차이즈의 무덤 대구에서 제대로 된 프랑스 빵 맛을 내는 후학을 키워내는 것이 이들의 꿈이다. |
대구시 동구 파계로 파계삼거리 부근에 널찍하게 자리잡은 빵집이 있다. 330㎡가 훌쩍 넘을 것 같은 매장은 1·2층으로 구성돼 있다. 곳곳에 유명한 작가들의 그림이 걸려 있다. 1층 매장에는 갓 구운 수십 종의 빵과 십여 종의 브런치 등이 입맛 까다로운 지역민을 기다리고 있다. 매장을 나와 주차장 오른쪽을 보면 전체적으로 붉은 색 계열의 페인트가 칠해진 철제 담벼락에 흰색으로 'Belleville'이라는 글자가 씌여져 있다. 이 빵집 이름이 '벨빌베이크하우스'다. 벨빌은 프랑스 파리 중심부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파리 20구 및 19구 일부 지역의 지명이다. 벨빌은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뜻이다. 오늘날의 벨빌은 독특한 문화적 특색으로 다양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그렇다면 빵집 이름에 왜 벨빌일까. 이곳에서는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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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구 파계삼거리 부근에 자리잡은 '벨빌베이크하우스' 전경. 벨빌은 프랑스 파리 외곽의 지명으로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뜻이다. |
◆공군사관생도, 대기업 직원, 빵집 셰프
1996년 가을 공군사관학교 4학년 생도였던 서용석(48)은 졸업까지 한 학기를 남긴 즈음 빨간마후라의 꿈을 접고 돌연 학교를 박차고 나온다. 사관생도가 자퇴하면 곧바로 하사관으로 의무 복무해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입대했다. 지나간 세월이 앞날을 가로막았다. 아프고 아픈 후회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정신을 차렸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전역 후 고려대 경영학과에 편입했다. 간절히 원했던 길은 아니었지만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롯데쇼핑)에 들어갔다. 새로운 점포를 개발할 때 사업 타당성을 분석하는 개발기획업무를 봤다. 6년 정도가 지났다. 자신의 뜻과 다르게 가는 조직문화에 회의를 많이 느꼈다. 분명히 진급 대상이었는데 누락되는 일이 벌어졌다. 사표를 썼다. 서용석은 그때를 회상한다. "혈기가 왕성했던 것 같다."
결혼을 했고 갓 태어난 딸이 있는 가장이 졸지에 백수가 됐다. 먹고살 일이 막막했다. 형이 생각났다. 프랑스에서 한국인 최초로 빵집을 하고 있다. 형은 그곳에서 제빵사로 일하다 20개 정도의 매장을 가진 브랜드의 한 점포 오너가 됐다. 이 브랜드는 공동 오너십으로 운영하며 우리나라의 대형 프랜차이즈 같이 공장에서 도우를 보내주는 형태가 아니라 직접 구운 빵을 파는 스타일이다. 형은 한국인 최초로 '바게트만들기 세계대회'에서 입상한 실력자다. 곰곰이 생각했다. 결론을 냈다. 가자 파리로. 그리고 빵 만드는 걸 배우자. 그 배경에는 3가지가 있었다. 형, 사업성, 무정년.
대기업 뛰쳐나온 가장, 무작정 프랑스로
한참 어린 셰프 밑에서 밑바닥부터 배워
7년 후 청담동에서 프랑스 빵맛 선보여
전국에 '커피번' 알린 프랜차이즈 대표
"입맛 까다로운 대구, 인정받으면 롱런"
제빵 전문가와 사업 전문가 의기투합
파계삼거리 아래 베이커리 카페 오픈
형이 프랑스로 가기 전 일했던 김영모 빵집에서 2개월 정도 기초를 배우고 출국했다. 아내와 생후 넉 달된 딸과 함께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서용석은 갈등했다. "형한테 배우는 게 맞는지 다른 곳에서 부딪히는 게 맞는지." 후자를 선택했다. 이력서를 만들어 영어로 소통도 안 되는 곳에서 짧은 영어로 "빵을 너무 배우고 싶어 한국에서 왔다. 돈은 안 받아도 된다"며 구직활동했다. 몇 곳에서 퇴짜를 맞고 어렵사리 숙소 옆에 있는 제과점에 급여를 받지 않는 조건으로 취직했다. 프랑스에서의 밑바닥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곳은 이른 나이에 직업전선에 뛰어든다. 그러다 보니 제빵업계의 경우 최고 셰프 바로 밑에 있는 셰프들의 나이가 20세 혹은 21세가 대부분이다. 이들한테 많이 혼나면서 배웠다.
1년 정도 지난 뒤 제빵전문학교에 진학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학교를 선택할 때 옵션이 있었다. 한국 유학생들은 대체로 귀국했을때 졸업장 혹은 수료장을 걸어 놓기 좋은 학교로 간다. 이런 학교는 대개 5~6개월 정도 수업한 뒤 현장에서 1~2개월 정도 실습하면 교육과정이 끝난다. 형과 상의를 했다. 이론적인 걸 배우 것도 좋지만 실제로 필드에서 일하면서 배우는 게 맞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2년 동안 한 달에 4~6일 정도 수업하고 나머지는 현장에서 일하는 학교를 선택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이런 류의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일할 곳을 먼저 구해야 한다. 서용석과 같은 처지에 있는 현지 학생들도 많았기 때문에 일자리를 찾기란 상당히 어려웠다. 그래도 이 길만이 살길이다 생각하고 여기저기 빵집 문을 두드리고 두드렸다. 마침내 문을 열었지만 최저임금의 30%만 주는 곳이었다. 감지덕지였다.
생활은 생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서울에 있는 부모님과 형이 재정적으로 도와주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견디다 못한 아내가 한국인이 운영하는 슈퍼마킷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과 학생들에게 보조해 주는 약간의 돈으로 2년을 버티고 버텼다. 학교를 마친 뒤 3년 정도 형 가게에서 일했다. 형 가게를 나와 다른 곳에서 1년을 더 일했다. 색다른 걸 경험해보기 위해서였다.
프랑스에 체류한 지 7년이 흐른 2015년 서용석은 가족과 함께 귀국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전통 프랑스 빵집을 열었다. '메종 알리스'. 알리스는 첫딸의 이름이기도 하다.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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