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블루스맨 '지구' 2....No 뮤직, No 지구 '나는 유명에 기죽지 않는다'

  • 이춘호
  • |
  • 입력 2021-02-26   |  발행일 2021-02-26 제34면   |  수정 2021-02-26

2
가끔 나를 끌고 온 나의 도반인 기타의 속마음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기타에 귀를 갖다대본다. 희한하지 않은가. 손대지 않으면 그냥 물건에 불과하지만 마음과 손가락의 터치를 섞으면 여기는 저기로 개화된다.

아버지는 강원도 화전민이었다. 그 심산유곡의 바람은 겨울이 되면 유달리 휘파람 소리를 낸다. 나도 산의 휘파람에 3도 음을 덧붙여 화성을 반죽해 보려 했다.

고향 주변은 군 부대들 밀집 지역이어서 군악대 연주를 자주 접한다. 그 소리가 날 이렇게 만든 것이다. 모친은 10년 전 봄, 아버지는 내가 음악쟁이가 되겠다면서 가출을 했을 때 세상을 떠나신다. 비어버린 맘은 오롯하게 음악으로 쏠리게 된다.

내 첫 기타는 사과궤짝에 철사줄
음악다방·빵집·대학로·해변…
전국 게스트하우스 돌며 버스킹
내 스승은 연습…어디서든 당당

틀에 갇히고 연출된 음악 거부
뚝심있게 '11분 아리랑' 만들어
"뮤지션이 사는 곳도 문화 명소"
신개념 하우스콘서트 열기도
'달빛통맹 포크뮤지션' 반열


5
그동안 60여곡을 작곡했고 6장의 정규음반을 제작했다. 11분짜리 편곡된 아리랑은 2집에 수록됐는데 그의 실험정신을 대변해준다. '사랑을 위한 사랑으로' '가자' 등은 특히 많은 후배 뮤지션들에 의해 공유되고 있다.

◆핑크 플로이드와 제임스 디오에 감전되고

강원도에선 통기타를 구입하기도 어려웠다. 사과 궤짝을 적당하게 잘라 연결해 통기타 모양을 대충 만들고 못을 박아 각기 다른 철사줄을 6개 구해 감았다. 둥당둥당~. 내게는 최고의 장난감이었다.

중3 겨울방학이 도래했다. 기타를 마스터하고 싶어 등록금을 들고 서울로 튀었다. 돈냄새 잘 맡는 서울역 앞 나쁜 아저씨한테 돈을 뺏겨 버렸다. 근처 전주에 부착된 구인광고를 보고 한 중국집을 찾아간다. 그 주인도 악덕업주였다.

우리 집은 강원도에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으로 이사간다. 그 동네에서 가장 높은 언덕배기가 '배틀고개'다. 거기 사는 쌍둥이 친구와 생애 첫 밴드를 결성한다. 비틀스를 모방해 '배틀스'라 명명했다. 우리 스스로는 비틀스와 쌍벽을 이룬다고 믿었다. 음악다방, 일일 찻집, 관공서 소소한 행사 등에 노개런티로 불려다녔다.

내게 가장 처음 다가선 자는 영국 브리티시록의 새로운 금자탑으로 불리기도 했던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였다. 그들의 음악을 들으면 은하수 속을 걷는 것 같았다.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이런 아련한 율조를 공연할 수 있는지 그 연주력이 한없이 궁금했다. 시드 배럿(기타·리드 보컬), 닉 메이슨(드럼), 로저 워터스(베이스 기타·보컬), 리처드 라이트(키보드·보컬), 나중에 가세하는 데이비드 길모어의 이름은 내 수첩의 상단에 항상 적혀 있었다. 핑크 플로이드를 떠나보낸 뒤 파워풀한 헤비메탈 싱어 중 한 명인 보컬 로니 제임스 디오가 날 단번에 사로잡아 버린다. 그 유명한 레인보우 시절 '템플 오브 더 킹'을 부를 때 음색은 압도적이었다.

◆뼛속까지 버스커

제대 후 서울·경기권 일대 통기타 무대를 전전했다. 어떤 때는 빵집에서도 라이브를 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1989년 생애 첫 창작곡인 '사랑을 위한 사랑으로'를 만들었다. 일사천리로 낸 독집 한 장이었다. 그 음반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 무렵 한국 연극계의 거장인 오태석을 만나 충돌소극장에서 스태프로 일을 했다. 훗날 김민기가 만든 학전소극장이 심장 구실을 했던 동숭동 대학로 소극장 구역에 있었던 야외공연장에서 들국화의 전인권 밴드와 술도 먹고 음향도 봐주면서 정말 잘 놀았다. 1998년부터 2005년까지는 호경기를 맞은 미사리 통기타라이브클럽촌 '쉘부르'에서 노래를 했다.

90년 여름에는 대학로 공원에서 '다솜'이라는 자선단체 밴드와 합류해 개인 콘서트 2번, 그리고 5년간 동해안 해변투어 버스커로 활동을 한다. 나는 뼛속까지 버스커 유전자로 물들어 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동상 위험을 무릅쓰고 혼자 눈밭 위에서 노래를 했다. 몰입과 최선, 이 두 힘 덕분에 나는 지금도 장소와 때를 불문하고 기타를 칠 수 있었다. 그 저력을 앞세워 전국 게스트하우스 뮤직 투어를 했다. 대구, 부산, 전주, 속초, 강릉, 원주, 제주도 등을 돌아다녔다. 그 연장에서 미국의 산타모니카에서 한 달간 교포 집에 머물며 내가 가진 음악적 오리엔탈리즘을 다 쏟아냈다. 또 홍콩,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버스킹을 했다.

나는 틀에 갇히지 않는다. 조건도 별로 따지지 않는다. 내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마음만 있다면 지옥이라도 간다. 나를 제대로 드러내는 것, 그게 소통이라 여겼다. 난 유명과 무명의 잣대에 걸려 넘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와도 당당하게 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후배 상당수는 아직도 유명한 것에 주눅이 들어 있다. 그냥 어떤 기준과 원칙에 갇혀 뭘 흉내만 낸다. 일종의 검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세상은 여전히 당신은 얼마나 유명한가를 묻는다. 그런 마인드 위에선 절정의 음악이 피어나기 어렵다. 조작되고 연출된 음악, 나는 그걸 거부한다. 날것의 음악, 익히지 않은 생식 같은 음악이 그립다.

누구 묻더라. '스승이 누구냐'고. 나는 '연습이 스승'이라고 대답해주었다. 연습의 연장 속에서 또 다른 내가 발견된다.

4
수많은 손가락의 터치에 견디다 못해 닳아나간 기타 상판의 한 언저리. 그 스크래치가 지구의 현주소를 대변해준다.

◆대구는 나의 2의 고향

1996년 '지상존애'라는 듀엣을 결성했다. 회사와 타협한 뮤직비디오에서 춤도 춰야 했고 방송에서 연기 아닌 연기도 해야 했다. 암튼 내가 원하는 음악도 앨범도 아니었다. 이후 난 내 맘대로 음반을 제작하고 싶었다. 1집은 6개월 공을 들였다. 타악기 전문가 유복성 그리고 미사리 라이브의 한 전설이기도 한 가수 박진광도 도움을 주었다. 2집에서는 11분짜리 '신아리랑'을 제작했다. 블루스에 국악의 기법을 섞었다. MBC '나는 가수다'에도 출연한 후배 가수 박희수에게 허밍 스캣 파트를 부탁했다. 그 곡은 너무 길어 기존 방송사는 감당하기 힘들다. 그런데 춘천MBC 모 피디가 고맙게도 그 곡을 전량 송출해줬다. 이후 작곡한 '가자' '내 슬픔에 위로를' 등을 통해 뒤뚱거리던 내 창법도 얼추 완성된다.

지구밴드는 'JB트리오'로 건너왔다. 15년이 지났다. 2011년에는 문화운동을 벌였다. 하우스 콘서트 '호미스'를 활성화시킨 것. '뮤지션의 거처도 문화명소'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

대구와의 인연도 깊다. 드럼 파트 최권호도 대구 출신이다. 그리고 블루스 기타리스트로 자릴 잡은 김종락, 사진작가 박순경, 팔공산 별담 소리재 대표인 백광범, 다님 게스트하우스 대표 이호원, 수성못 옆 참우양곱창 대표 장손태…. 그리고 대구와 광주 포크뮤지션의 결합체인 '달빛통맹 콘서트'도 날 깨어있게 만든다. 그들 덕분에 나그네인 내가 대구에 와도 굶지 않고 공연할 수 있다.

술이 절정을 향할 때, 그때가 그믐밤이라도 좋다. 난 불길처럼 밥 말리의 '노 우먼 노 크라이'를 '노 뮤직 노 지구'라 외쳐본다. WHY? 난 지구니까!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