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통신의 역사 2] 1984년 등장한 카폰, 승용차 한대보다 비싸…'富 과시' 가짜 안테나 달기도

  • 유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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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3-05   |  발행일 2021-03-05 제34면   |  수정 2021-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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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의 등장은 국내 휴대전화 시장의 주도권을 통신사에서 스마트폰 회사로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대구 중구에 위치한 통신골목 전경.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국내 이동통신은 어떻게 변해왔나

국내 이동통신의 역사는 1984년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의 위탁회사인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식회사(현 SK텔레콤의 전신)가 AMPS(Advanced Mobile Phone System) 방식으로 '차량전화(카폰)' 서비스를 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당시 카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카폰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설비비 88만5천원과 채권 20만원에다 허가신청료, 장치비, 무선국 준공검사료 등을 포함해 총 116만8천원을 내야 했다. 여기에 단말기 가격(300만원)은 빠져 있었다. 다 합치면 400만원 이상이 필요했다. 1982년 출시된 포니2 승용차 1대 가격이 350만원가량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웬만해선 살 엄두를 낼 수 없는 물건이었다. 이런 탓에 과시용으로 자동차 외부에 가짜 카폰용 안테나를 달고 다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카폰은 없지만 안테나만 달아 놓고 고위층이나 갑부인 척 행세하기 위했던 것.

이처럼 실용성보다는 '과시용'에 그쳤던 휴대전화의 빈틈은 '삐삐'로 불린 '무선호출기'가 채웠다. 1982년 수도권 지역 위주로 이뤄지던 서비스는 1986년 3월 부산 , 10월에는 대구·대전·광주 지역으로 서비스 지역을 넓혀갔다. 012·015로 시작하는 별도 변호가 있었지만 직접 통화를 할 수 없었다. 무선호출기 흑백액정에 찍힌 연락처로 전화를 하거나 상대방이 음성사서함에 녹음한 메시지를 공중전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는 한글 문자가 아니라 숫자로만 표시되는 탓에 8282(빨리빨리), 8255(빨리오오), 7942(친구사이), 101023535(열열히사모사모), 012486(영원히사랑해) 등의 암호가 유행하기도 했다.

삐삐가 많아지면서 음성메시지를 확인하거나 전화를 하기 위해 공중전화에 길게 줄서는 게 일상이 됐고 그 틈새를 노리고 '시티폰'이 등장했다. 공중전화 인근(100~200m)에서는 지금의 휴대전화처럼 발신 전화가 가능했기 때문에 길게 줄을 서 있던 이들 사이에서 폼나게 전화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발신만 가능한 데다 공중전화 인근이 아니면 무용지물이었다.

시티폰은 얼마 지나지 않아 PCS(개인휴대통신)의 등장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PCS시대는 1996년 KTF, 한솔PCS, LG텔레콤 등 3개 컨소시엄이 PCS 사업권을 따내면서 1997년 10월1일부터 각각 016, 018, 019로 서비스를 시작했다. PCS의 기술방식은 당시 '셀룰러'라 불리던 011(한국이동통신)과 017(신세기이동통신)과 같았지만 쓰는 주파수 대역은 850㎒(메가헤르츠)와 1.8㎓(기가헤리츠)로 달랐다. 당시 휴대전화는 지금과 달리 여러 주파수 대역을 지원하지 못한 탓에 주파수가 다르면 기기도 달라야 했다. 지금은 아주 당연하지만 처음 휴대전화를 사용할 당시 번호를 다 누른 뒤 'SEND' 버튼을 눌러야 전화 연결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더 많았다.

이처럼 모든 게 생소했던 휴대전화 아날로그 시대를 넘어 PCS의 등장으로 활발해진 2세대 이동통신서비스는 음성통화뿐만 아니라 SMS·e메일 등 데이터 전송이 가능했다. 이후 3세대에 들어서는 음성통화는 물론 영상통화·멀티미디어 콘텐츠 활용까지 가능해졌다.

82년 첫 등장한 무선호출기 '삐삐'
4년 후 대구 등 지역에서도 서비스
'숫자암호' 유행하고 공중전화 긴 줄
발신전용 시티폰 덩달아 반짝 인기
97년 발신·수신 다되는 PCS 등장
데이터전송·영상통화…기술 진화

음악감상·전화·인터넷을 하나로…
아이폰의 등장으로 업계 지각변동
통신사에서 생산사로 주도권 이동


◆아이폰, 스마트한 휴대전화로 세상의 기준을 만들다

영상통화까지 가능한 3세대 이동통신서비스 등장으로 휴대전화 이용이 익숙해질 때쯤, 같은 모양의 전화기가 똑똑해지면서 또 한 번의 휴대전화 혁명이 일어났다. 바로 스티브 잡스로 대표되는 애플이 '아이폰'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2007년 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맥 월드' 행사장. 청바지에 검은색 터틀넥을 입고 나선 스티브 잡스는 1984년 매킨토시, 2001년 아이팟에 이날 3가지 혁신적인 기술을 선보인다고 밝히면서 '터치로 조작할 수 있는 와이드스크린 아이팟' '혁신적인 휴대폰' '획기전인 인터넷 통신기기(인터넷 브라우저)'를 소개했다. 그러면서 이 기술은 각각의 제품이 아니라 단 하나의 제품이라며 주머니 속에서 이전에 없던 새로운 휴대전화를 꺼내 '아이폰'이라고 불렀다. 그는 "지금 나와 있는 스마트폰들은 그다지 스마트하지 않다"면서 "아이폰은 어떤 제품보다 스마트하면서 사용하기 편한 제품이다. 오늘 휴대폰을 재발명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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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전화 주변에서 발신만 가능했던 시티폰(왼쪽)과 삐삐.

 

그렇게 등장한 아이폰은 국내 도입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일부에서는 당시 애플에 비해 스마트폰 도입이 늦었던 삼성전자가 제품 개발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막았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답답했던 얼리답터들은 미국 출장길에 아이폰을 구입, 개인이 별도로 전파인증을 받아 국내에서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국외에서 구입한 휴대전화 기기는 국내 이동통신사가 개통해 줄 수 없는 구조였던 탓에 개인이 방송통신위원회 산하 전파연구소에서 직접 전파인증을 받은 뒤 이동통신사에 가입해야 했다. 이런 탓에 관련 요금제도가 없어 다른 스마트폰 전용 데이터 요금제를 사용했다. 국내 소비자의 연구가 이어지면서 2009년 11월28일 국내 공식 출시 행사가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이뤄졌고 사전 예약한 고객이 전날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동통신업계 한 관계자는 "아이폰은 그동안 국내 휴대전화 시장의 주도권을 통신사에서 스마트폰 생산 회사로 바꿔 놓았다. 그동안은 휴대전화기기에 통신사가 자신의 로고를 표시하도록 사실상 강제했지만 아이폰은 그것을 넣지 못하게 했고 국내 독점 공급에 나섰던 KT는 이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말했다.
유선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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