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9] 이장희, 섬세·감각적 표현으로 근대시 새 지평 '활짝'

  • 최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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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4-26 08:09  |  수정 2021-04-26 08:10  |  발행일 2021-04-26 제20면
대구 부호의 아들로 편안한 삶 거부하고 시인의 삶 선택…29세로 사망 전까지 작품 40여편 발표
멀리서 들려오는 쓸쓸한 벌레소리·고양이 털처럼 부드러운 봄…자연을 시각화해 시로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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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희

고월 이장희(1900~1929) 시인은 같은 대구 출신으로 동시대에 활동한 이상화 시인과 비교하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지역 출신 문인이다. 봄을 고양이에 빗댄 시 '봄은 고양이로다'가 유일하게 잘 알려진 그의 시다. 1920년대 활동했던 이장희는 당시 보기 드물었던 섬세하고 감각적인 표현으로 한국 근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시인으로

이장희는 1900년 11월9일 대구 중구 서성로1가 103번지에서 이병학과 박금련 사이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여러 자료에는 그의 생가를 서성로1가 103번지 또는 105번지로 적고 있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 이병학이 여러 채의 집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이장희의 아버지는 대구의 부호로 중추원참의를 지내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 불릴 만큼 영리했던 이장희는 1906년 대구보통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착실하며 예의 바른 모범생이었다. 1913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京都)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귀국해 목사가 되려는 꿈을 가졌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포기한다.

이후 아버지는 이장희에게 총독부 관리가 되기를 요구했지만 이장희는 이를 거부했다. 일본의 식민 지배에 순응해 집안을 더욱 번창시키겠다는 뜻이 강했던 아버지와 이장희는 늘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그를 버린 자식으로 보기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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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백기만이 이상화와 이장희의 작품을 모아 발간한 '상화와 고월'. <영남일보 DB>

교토중학교 시절부터 이장희는 글을 썼다.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건 1924년 친구인 목우 백기만의 주선으로 '금성(金星)' 동인이 되면서부터다. 이장희는 1924년 5월 '금성 3호'에 시 '실바람 지나간 뒤' '새 한 마리' '불노리' '무대' '봄은 고양이로다' 등 5편을 발표했다.

금성을 통해 시를 발표한 이후 그는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이장희는 '금성' 동인이 된 1924년 5월부터 1929년 11월까지 총 40여 편의 시를 발표했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발굴된 건 34편이다. 게재지별로 보면 '금성' 5편, '신여성' 2편, '문예공론' 3편, '신민' 13편, '중앙일보' 1편, '여시' 1편, '생장' 2편, '여명' 3편, '조선문단' 1편이 있고, 이외에 3편은 어디에 게재됐는지 알 수 없다. 이상화와 이장희의 시를 정리해 '상화(尙火)와 고월(古月)' '씨뿌린 사람들'을 낸 백기만 시인에 따르면, 유고 8편은 출판을 기대하고 이상화의 사랑방 천장에 숨겨뒀으나 이상화가 가택 수사를 받는 바람에 이장희의 유고 8편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감각적인 시어와 시각화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봄은 고양이로다)

이장희의 시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봄은 고양이로다'이다. 당시 이장희는 1920년대 시단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고양이를 시적 대상으로 삼았다. '봄' 하면 대부분 진달래·개나리 등의 꽃을 떠올리지만, 그는 이처럼 평범한 시적 대상을 채택하지 않았다.

고월의 또 다른 시 '고양이의 꿈'에도 고양이가 등장한다. 이 작품은 시인이 꿈에 본 고양이를 환각적으로 그렸는데 밝은, 푸른, 검은 등의 색상이 절묘하게 배합된다.

그는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의 순환에 따라 변하는 자연을 시각화해 시로 표현했다. '실바람 지나간 뒤' '비오는 날' 등의 시에선 봄의 감각을 회화화했으며, 여름을 소재로 한 시는 '하일소경' '봉선화' '여름밤' 등이 있다. '벌레우는 소리' '귀뚜라미' '쓸쓸한 시절' 등 가을을 소재로 한 작품에는 가을의 차가운 느낌과 쓸쓸한 정서를 담고 있다. '겨울밤' '겨울의 모경' '연' 등의 시는 겨울을 소재로 했다.

◆쓸쓸함, 고독의 시인

이장희의 시에는 '쓸쓸한' '서늘한' '싸늘한' 등의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고양이의 꿈'에선 그의 시적 주체가 머무는 공간은 '쓸쓸한 모래 우'로 표현된다. 이장희는 멀리서 들려오는 '쓸쓸한 벌레소리'(시 '벌레 우는 소리')에 귀 기울였고 '쓸쓸한 심령'(시 '청천의 유방')의 소유자였다. 이 같은 쓸쓸한 정서는 어쩌면 그의 삶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장희의 삶을 되짚어보면 '쓸쓸한 장면'이 적지 않다. 다섯 살 때 어머니가 사망했고, 형제·누이 등 여러 번 가족의 죽음을 목격했다. 편안하고 안락한 곳이어야 할 집은 그에게는 휴식처가 되지 못했다. 이장희는 돈과 명예밖에 모르는 아버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과 뜻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배척하며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켰다.

이장희의 시에서 드러나는 쓸쓸함은 저녁을 배경으로 한 12편의 시에서도 느껴진다. 대표적인 시는 '동경' '석양구' '겨울밤' '겨울의 모경' '귀뚜라미' 등이다. 그가 저녁을 노래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주로 저녁에 외출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상순은 '고월과 고양이'에서 "그의 외출시간은 거의 일몰 후였다. 그 이유는 주로 거리에 넘쳐흐르는 속인(俗人) 속물(俗物)의 추악한 표정이 보기 싫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29세의 젊은 나이로 죽기 전까지도 그는 쓸쓸하게 지냈다. 2~3년 전부터 심한 신경쇠약에 걸려 있었던 이장희는 부친의 서울 장사동 살림집 사랑에서 외롭게 지내다 세상을 떠나기 3~4개월 전 고향 대구로 내려왔지만 외출하지 않았다. 자신의 집 행랑채에 머무르며 2~3일간 방에서 나오지 않고 배를 깔고 엎드려 금붕어만 그리다 1929년 11월3일 음독자살한다.

◆시로 자신의 존재 증명

노동과 직업 같은 근대적인 제도와 규율, 가족과 문단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배제시켰던 이장희에게 시는 오롯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법이었다. 아버지가 제안한 편안한 삶을 거부하고 시인의 삶을 택했던 그에게는 시가 전부였다. 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한국현대시인연구(김재홍)는 "고월은 남을 위해 시를 쓴 시인이 아니다. 비록 그의 시가 타인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지라도 그는 그것을 의식하고 시를 쓰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백기만의 회상을 통해서 이장희의 시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자신의 시를 비방하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이장희는 "시는 푸라치나(platina: 백금·팔라듐·이리듐 등의 자연 합금) 선이라야 한다. 광채 없고 탄력성 없고 자극성 없는 굵다란 철사 선은 시가 아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장희가 시를 대하는 방식은 오상순의 '고월과 고양이'에서도 나타난다.

"고월의 시작에 대한 태도는 시의 테마를 하나 잡으면 뼈를 깎고 피를 말려가면서 며칠씩 밤을 새워 그 완벽을 기필하고 마치 쥐를 노리는 고양이, 알을 품은 암탉의 태도요 자세였다. 우리들의 고월은 평생 시밖에 몰랐다. 고월은 시에 나서, 시에 살고, 시에 죽은 진실로 고고한 시인이다."

최미애기자 miaechoi21@yeongnam.com
공동기획 : 대구광역시

▨참고문헌=대구 문단 인물사(윤장근), 한국현대시인연구 7-이장희(김재홍 편저), 한국문예비평연구-고월 이장희의 시와 감각어적 특징(장도준), 한국현대문학연구 37-이장희의 시, 우울의 '기원'(조은주), 논문 '고월 이장희 시 연구'(정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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