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숙의 실과 바늘 이야기] 한국과 중국 베갯모 풍정

  • 이경숙 박물관 수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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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4-30   |  발행일 2021-04-30 제36면   |  수정 2021-04-30 08:55
그 시대 민족의 삶과 인문학적 향기 드러내는 '문화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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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소수민족 베갯모 화족도 (박물관 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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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가 금두꺼비를 가지고 놀다

잠을 잘 때 사용하는 베개에 대해서 지금 우리는 다만 건강과 관련지어서 인식할 뿐이다. '베개의 기호학' 또는 그 안에 쌓인 유구한 '베개의 문화사'에 대해서는 깊이 인식하지 못해왔다. 또한 전통적 방식의 베개에 나타난 민족적 특성에 대해서도 유의하고 있지 않다. 이 작은 베개 속에 담겨진 문화적 함의가 각 민족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그것은 곧 우리자신의 문화적 특질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 역시 간과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게 분명하게 베개는 각 민족이 가진 다양한 문화적 특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까운 중국의 베개만을 살펴보더라도 그렇다.

중국의 베개에 대한 귀한 책은 만주족 출신으로 2005년에 민족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굉복(李宏復)박사가 쓴 '베개의 풍정(風情)'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이 박사는 중국의 소수민족들이 사용했던 다양한 베개뿐만 아니라 베개의 종류와 역사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중국의 다양한 자수베개에 대해서도 폭넓은 자료를 사진으로 담아내었는데, 우리나라의 베개와는 다른 중국의 양식을 접할 수 있어서 무척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 박사는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22개 소수민족의 베개를 현장답사를 통해 수집하고 연구하였다. 특히 책 첫머리 도판에는 '행복'이라고 쓰인 우리나라의 베갯모를 한 페이지를 할애해서 소개하고 있다. 그녀는 조선족들은 베갯모 수를 놓으면서 민족적 문자를 고유의 도안으로 소화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한국의 베갯모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양식이었기 때문에 책을 펼친 순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다른 자수베개를 이처럼 크게 다루고 있지 않기에 저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베개를 연구한 그녀를 언젠가 한번은 꼭 만나보고 싶은 생각까지 했다.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았으나 늘 두고 보아도 따뜻하고 정겨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 우리 베갯수다. 그것은 무기교의 기교, 무심의 미, 해학성 등으로 일컬어지는 한국적 미의 특질을 잘 드러내고 있다.


문자도안으로 베갯모 수놓은 조선족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양식
기교는 없지만 따뜻하고 정겨운 느낌
베개에 스며든 어머니들의 희생·헌신

中-다채로운 서사적 공간 속 이야기
韓-과감하게 생략되고 詩적인 함축미
베갯모 위쪽에 두 句만 택해 수 놓아
아랫구절은 상상할수 있는 교양 지녀
현전자수에 쉽게 볼수 없는 높은 경지



그런 베갯수가 이제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박물관에 소장된 베갯수들도 10년의 세월을 견디는 동안에 잠깐 손이라도 스치면 바스락 부서져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한시적인 시간 안에서 모든 것이 사라져 간다는 것이 명백한 진리임을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고운 어머니의 얼굴에 진 잔주름을 바라보는 것처럼 마음이 아려온다. 누군가는 나에게 "베개를 잘 보관하고 연구하느라 힘들었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도리어 베개의 아름다움과 옛 여인들의 마음에 기대 위안 받고 살았다고 말한다. 오랜 시간 그 베개를 들여다보면서 어머니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해냈고 틈틈이 어머니들의 고운 이야기들을 기록하면서 내 삶의 많은 시간들을 물들여 갔다.

누구나 소중하고 고귀한 그 무엇에 열정을 가지고 있겠지만 나에게는 우리자수의 아름다움에 기대서 살아왔다는 것이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었다. 이 베갯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떤 황망한 삶을 살았을까? 생각하는 것조차 힘들다. 그래서 내가 베개를 지켜 온 것이 아니라 내가 베개에 기대어 살아온 삶이 이제야 보이는 것이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이렇게 우리베개의 아름다움에 깊이 빠져 있는 동안 동아시아의 베개에 대해 궁금함이 더해갈 무렵 이굉복 박사의 '베개의 풍정'이라는 책을 구하게 되어 무척이나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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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문자도 베갯모.

중국 베갯수는 작은 면적 안에 매우 다채로운 서사적인 공간을 만들어 가는 특징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중국은 모란꽃수를 놓으면 줄기와 바위 그리고 작은 봉오리와 그 곁에 깃든 나비나 새까지 한편의 장면을 이야기기 하듯이 섬세한 표현이 특징적이다. 그에 비해 한국의 베갯수는 꽃 자체에만 집중하여 과감하게 생략된 시적 표현으로 함축미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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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도 詩

또한 중국 베갯수를 보면서 그 속에 투영된 수준 높은 인문학적 소양에 대해 거듭 감탄했다. 이를테면 이 박사의 책에서 우리나라 유학자들도 존경했던 송(宋)나라 때의 대학자인 명도(明道) 정호(程顥)라는 이가 지은 '봄날 우연히 짓다(春日偶成)'란 시를 베갯모에다 수로 놓은 것이 있었다. 雲淡風輕近午天(맑은 구름에 살랑 바람 부는 어느 대낮에) /傍花隨柳過前川(꽃을 찾아 버들 길 따라 앞 시내를 건너네) /時人不識余心樂(주변 사람들은 이런 즐거움을 알지 못한 채) /將謂偸閒學少年(이보게, 한가함 틈타 소년 되려고 하나 라네).

베갯모에는 위쪽 두 구(句)만 택해 수를 놓았다. 그러나 중국이나 우리나라 선비들은 모두 아래 구절을 상상할 수 있는 교양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현전하는 자수에서는 쉽사리 만나기 어려운 수준 높은 경지라고 생각해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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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소수민족 용문자도 베갯모.
백년해로
백년해로.

그러던 중에 우연히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1629-1711)의 서문(序文) 한 편을 읽게 되었다. 그곳에는 조선 중기의 한 여인이 시를 짓고 글씨로 쓴 뒤 다시 그것을 베갯수로 놓았던 사실이 적혀 있었다. 보다 놀라운 사실은 그곳에 남편의 당호를 베갯모 네 모서리에다 정성껏 수놓았다는 사실이다 '제임벽당(題林碧堂)'이다. 남편의 아호로 쓴 집 이름을 노래한 시라는 의미다. 이처럼 소중한 사연은 6세 후손(杞溪 兪命衡, 1642년 생)이 베갯수를 잘 간직했다가 남구만에게 글을 부탁해서 수첩(繡帖)으로 만들어지면서 비로소 세상에 남을 수 있었다. 숙종17년(1691)에 그가 쓴 '김부인(金夫人)의 침각수(枕角繡) 시(詩)의 서문(序文)'이 바로 그 것이다. 베갯수를 침각수(枕角繡)라 명명한 것도 흥미롭다. 그녀의 남편은 중종 당시 현량과(賢良科)로 추천되었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비인현(庇仁縣, 충남 서천 지역) 선영 아래로 터를 잡아 은거해 '임벽(林碧)'이라고 현판을 걸고 해로하며 평생을 마쳤던 유여주(兪汝舟)였다.

나라의 큰 인재로 살 수 있었음에도 바른 길을 가기 위해 은둔을 택한 부군의 뜻을 잘 받들며 가난한 살림에도 절구(絶句) 두 수를 짓고 이를 정성껏 수를 놓았던 김씨 부인의 자수 실물이 무척 궁금해졌다. 그러나 부부가 함께 쓰다가 자손들에게 전해진 베개 모서리 자수는 6세손에 의해 자수첩으로 갈무리되어 남았을 것이나 지금은 그 행방이 묘연하다.

남구만은 이 자수와 시에 대해 "저 중국의 회문시(回文詩) 수를 놓은 부인이나, 200여 수의 시를 비단에다 자수로 놓아 남편에게 주었던 그들이 재주를 부리고 화려함을 다투어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현란(絢爛)하게 한 것과 비교할 수 없다"고 평했다. 시의 내용이 맑고 담백할 뿐 아니라 자수를 놓은 솜씨가 공교하고 섬세하다고 칭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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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숙 (박물관 수 관장)

이처럼 한국과 중국의 베갯모 자수에는 그 시대의 인문학적 향기를 드러내는 문화적 도구였음을 이해하게 된다.

봄꽃들이 다 쓰러지기 전에 베개 높이 베고 베갯모에 스민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들으며 꿈길을 걸어가면 김씨 부인의 자수첩을 만날 수 있을까?

박물관 수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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