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11] 서동균…석재 서병오 대표제자 후세 남기기 위한 작품 50점만 골라내고 소각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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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5-24 08:11  |  수정 2021-05-24 08:14  |  발행일 2021-05-24 제20면

스승 서병오에게 묵죽 배워  회화성 넘치는 '죽농풍' 확립 후 日 대가로부터 세밀한 필법 습득
서화 모두 능했지만 문인화에 특히 뛰어나…1970년대 원근감 드러나는 개성적 작품세계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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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균 작 '묵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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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농(竹農)서동균(1902~1978)은 긍석 김진만과 더불어 석재 서병오의 대표적 제자다. 서병오가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관을 덮을 명정(銘旌)을 쓰라는 유언을 남긴 제자가 서동균이다. 또한 그는 서병오가 창립해 이끌어오던 교남시서화연구회를 물려받아 운영했다. '죽농'이라는 호도 서병오가 지어주었다. 서동균은 임종 전 "작품이란 종이의 상태에 따라 수백 년도 보존된다. 지금까지 남의 손에 들어간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내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라도 정리해서 후세에 남부끄럽지 않은 것들만 남긴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동안 모아 두었던 자신의 작품 700여 점 중 스스로 남겨도 될 만한 작품으로 생각한 50여 점을 골라내고, 나머지는 모두 불살라버렸다.

서동균은 대구 향촌동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7세 때인 1908년부터 조부 서용묵에게 천자문과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서병오의 스승으로 당대의 영남 명필인 서석지(徐錫止)와 교분을 맺고 있던 조부는 서예에도 뛰어났다. 조부는 병세 3년 전 온 힘을 다해 손자 서동균에게 붓글씨 체본을 써주기도 했다. 조부 별세(1911년) 후 서동균 부친은 당시 대표적 선비인 김만취(金晩翠)를 스승으로 모셔 서동균에게 소학,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을 배우게 했다. 15세 때(1916년) 서병주가 개설한 강습소에서 신학문을 배운 뒤 이듬해 해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해 공부하며 서동진, 이효상, 백기만 등과 교우관계를 맺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돼 투옥, 6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 후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대표적 화가 나카무라 후세츠(中村不折),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 문하에서 1년 동안 서화를 연마했다. 훗날 서동균의 문인화에서 엿볼 수 있는 남다른 회화성과 소묘 기량은 이때의 학습효과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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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화분과 영지'

◆서병오 문하에서 본격적 서화 공부

서동균의 본격적인 문인화 공부는 서병오의 문하에 입문하면서부터 이뤄졌다. 서병오는 1920년 의성군수 관사에 걸려있던 서동균의 15세 때 서예작품을 보고는, 대구로 돌아와 그를 불러 만나본 뒤 제자로 삼고 '죽농(竹農)'이라는 아호도 지어주었다. 서병오는 당시 자신의 글씨 및 그림 몇 작품과 당나라 명필 안진경의 서첩 한 권을 주며 "자네가 이 서첩을 백 번 쓰면 겨우 글자 흉내만 낼 것이고, 천 번을 쓰면 글씨 잘 쓴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며, 만 번을 쓴다면 틀림없이 명필이라는 소릴 들을 것이네"라며 열심히 노력할 것을 당부했다. 서동균은 5년 동안 5천 번을 썼다고 한다. 서병오 문하에서 서화에 매진한 서동균은 조선미술전람회에 사군자를 출품, 연속 8회 입선하기도 했다. 서병오 별세 후 교남시서화연구회를 맡아 서화 활동을 펼치고, 1938년에 2차로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에 2년 동안 머물다 귀국했다. 광복 후에는 경북여고와 신명여고 교사로 재직했고, 교남시서화연구회는 영남서화회로 개칭한 뒤 '영남서화원' 간판을 내걸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1925년에는 스승인 서병오와 진주 한시백일장에 참여한 후 돌아오는 길에 단양을 들렀다가 그곳 사람들의 요청으로 서화 전람회를 가졌다. 그 이후 진주에서 개성 출신의 서화가 미산(美山) 황용하와 만나 합동전을 열고, 1930년에는 공주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그리고 1960년 부산 개인전 등 25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1931년에는 대구 미술인들이 모여 만든 '향토회'의 멤버로 활동했다. 서동균, 김용진, 최화수, 서동진, 박명조, 최유근, 한성준 등이 멤버였다. 서화가로는 서동균이 유일했다. 서동균은 향토회전에 '풍경' '장미' 등을 출품했다. 전통 문인화 소재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재를 소화하기도 했다. 광복 후 10여 년간의 교직 생활 중 경북여고 재직 때는 교내 중등교원양성소에서 동양미술사를 강의하고, 1957년부터 신명여고에서 4년간 재직했다. 만년에는 대구대와 효성여대 에서 서화를 지도했다. 이 시기에 서화 작업도 가장 왕성하게 했다. 1966년에는 제자들의 요청으로 1년 정도 서울에 머물면서 활동했다. 일중 김충현(1921~2006), 시암 배길기(1917~1999), 검여 유희강(1911~1976) 등과 함께 중앙에서 열리는 서예전의 작품심사에 참여하고 개인적인 서화 지도를 하기도 했다. 1957년 제2회 경북문화상을 수상하고, 1975년에는 제7회 대한민국 미술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서동균의 작품세계

서동균은 서화 모두에 능했지만 문인화는 특히 뛰어났다. 그중에서도 묵죽화는 자신의 필명에 걸맞을 정도로 출중했다.

서동균은 회고록을 통해 '내 필법이나 화법은 내가 만든 것'이라며 남화의 오창석과 사군자의 정판교를 참고하고, 해·행서는 안진경·소동파·황산곡·유공권·동기창을, 전서는 고정(固鼎), 예서는 한의 장천비(張遷碑)를 가미한 서체라고 설명했다.

문인화 중에는 매화와 대나무를 압도적으로 많이 그렸다. 작품 경향을 보면 서병오 문하에서 서화를 연마하던 학습기는 농묵이 강하게 나타나고 발묵성 짙은 필치가 특징이다. 모색기(1950~1960)는 자신의 개성을 찾아가는 시기로, 보다 밀도 있는 필선을 사용했다. 바위 묘사에서 그런 점이 두드러진다. 확립기인 1960년대와 만년기인 1970년대는 서동균의 개성이 현저하게 드러난 작품들이 완성된다. 특히 사군자 작품들은 원근감과 탄탄한 구도감을 갖추고 있어서 일반 회화를 방불케 한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원근감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등 회화적 요소가 두드러지는 개성적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묵죽(墨竹)을 많이 작업하면서 독자적 화풍을 이룩하게 된다.

서동균은 산수화도 적지 않게 그렸는데, 산수화는 모색기와 확립기에 주로 그렸다. 일본에서 학습한 서양화 기법과 남종화는 그의 산수화 작업에 영향을 주고, 그의 문인화의 회화 성향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서동균은 조선미전 제7회와 제8회에서 '묵죽'으로 입선하고, 서화협회전에서 3회 입선하며 묵죽 분야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묵죽은 서화가로서 그의 명성을 드러내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20대부터 시작한 묵죽은 서병오의 지도를 받으며 시작되었다. 그 이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 대가들의 묵죽을 모방하는 단계를 벗어나 50대에 이르러서는 점차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발휘하기 시작하고, 60대 이후에는 독자적 묵죽 그림을 완성하게 되었다. 서병오에게서 배운 농묵과 발묵의 서예적 필치 중심의 '석재풍' 묵죽을 토대로, 회화성이 넘치는 '죽농풍' 묵죽을 확립하며 일가를 이룬 것이다. '이것은 오창석 선생의 필의(筆意)를 사용한 것이다' '포화 노인이 이 기법을 잘 사용했다' '장판교의 필의를 본받았다' '내가 소년 시절에 판교 정섭이 그린 소폭의 대나무 그림을 봤는데, 그 신묘한 필치가 지금까지 늘 눈에 선하여 잊을 수가 없다'

대가들 작품의 필의를 본받으려는 서동균의 노력은 만년까지 지속되었다. 1965년 전후에는 서예적인 힘찬 필치와 맑고 담박한 먹의 운용으로 회화적 표현이 나타난다. 서동균 묵죽의 독창성은 회화성에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먹의 풍부한 농담 변화, 대상의 배치, 공간의 활용 등 표현 요소를 조화롭게 활용해 대나무 표현에만 그치지 않고 회화적 표현을 두드러지게 한 것이다.

서동균은 학습기에는 서병오의 영향을 받아 농묵의 필법을 구사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화단의 대가들로부터 세밀한 필법과 맑은 묵법으로 대상을 표현하는 기법 및 화면 구성법을 습득했다. 이런 기법들은 그의 문인화에 회화성을 불어넣는 특성으로 작용하게 된다. 스승인 서병오의 문인화 작품이 서예적인 데 비해, 그의 문인화는 농담 변화와 풍부한 색으로 대상의 입체감을 표현하고, 구도를 화면 전체로 확대하면서 풍부한 회화성을 지니게 하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공동기획 : 대구광역시

▨ 참고자료: 대구미술 100년사(근대편)/대구미술협회(2015), 한국학논집 제49집/계명대 한국학연구원(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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