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전문기자의 푸드 블로그] 대구권 마지막 조청명가 경일식품...한과명인들이 찜한 진짜 糖…프랜차이즈 치킨 소스에도 들어갑니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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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7-30   |  발행일 2021-07-30 제35면   |  수정 2021-08-24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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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청은 고두밥과 엿기름을 같이 넣고 삭힌 뒤 따뜻한 곳에 두면 식혜가 되는데 이때 건더기를 제거하고 당화된 물만 졸여 내면 된다. 수분을 더 제거하면 엿이 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조청은 한국인들에겐 최강의 당원(糖源)이었다. 대표 한과였던 강정을 만들 땐 어김없이 물엿 대신 조청을 사용했다. 하지만 8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기업이 가성비 좋고 빠른 시간 내 단맛의 효과를 내는 물엿의 시대를 연다. 마치 다듬잇돌이 다리미로 대체되는 것과 비슷한 정황이었다.
농경사회 때만 해도 '쓴맛의 미학'이 건재했다. 하지만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국면이 달라진다. 쓴맛은 약(藥)의 영역으로 밀려나고 대다수 식단은 단맛한테 지배된다. 단맛이 단연 현대인에게 황홀한 존재로 군림하게 된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사람의 혀를 녹여낼 만한 여러 가지 감미료가 등장한다. 대표적인 게 '설탕'이다. 현재 식품공학자들이 분류한 바에 따르면 무려 50여 종의 각종 감미료가 유통되고 있다. 가히 '단맛 인플레이션 시대'가 개막된 것 같다.

조청이란
설탕·물엿처럼 정제糖 아닌
식혜 전통방식 졸인 농축액
대기업의 단맛에 밀렸다가
힐링식품으로 새롭게 조명


우린 오래 '물 엿 권하는 사회'에 길들여졌다. 그런데 물엿에 지친 소비자 사이에서 '조청(造淸)'이 힐링식품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조청은 고두밥과 엿기름을 같이 넣고 삭힌 뒤 따뜻한 곳에 두면 식혜가 되는데 이때 건더기를 제거하고 당화된 물만 졸여 내면 된다. 수분을 더 제거하면 엿이 된다. 조청의 '청(淸)'자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선다. 왜 '맑은 청'일까? '곡물(녹말)의 물성을 불길로 다스려 앙금처럼 순수한 형태로 추출한 천연의 단맛'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 건 아닐까.

아무튼 조청은 설탕과 꿀과 물엿의 접점에서 태어난 것 같다. 조청은 이전 농경사회에선 절대적인 천연 감미료였다. 식혜(감주)에서 발원된 조청을 더 굳히면 '갱엿'이 되고 그걸 더 늘리면 흰엿이 된다. 갱엿은 워낙 붉은 기운이 감돌아 일명 '핏엿'으로도 불렸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조청은 한국인에겐 최강의 당원(糖源)이었다. 대표 한과였던 강정을 만들 땐 어김없이 물엿 대신 조청을 사용했다. 하지만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기업이 가성비 좋고 빠른 시간 내 단맛의 효과를 내는 물엿(초창기에는 '이온 물엿'이란 이름으로 출시됨)의 시대를 연다. 마치 다듬잇돌이 다리미로 대체되는 것과 비슷한 정황이었다.

최고로 손꼽힌 까닭
1980년대 가짜 조청 판치자
조합만들어 성분 분석·공개
'경일조청 엄지척' 평가받아
쌀가공품 품평회서 장관상
강릉·봉화·의령·서산·보은…
전국 한과명인들의 '원픽'


◆대구권 마지막 조청공장

그 많던 조청 공장은 모두 어디로 가고 없을까? 현재 대구에는 조청 만드는 공장이 하나도 없다. 오뚜기 등 대기업 식품회사가 가내수공업 형태로 이뤄지던 조청 공장을 고사시켰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전국적으로 남아 있는 건 스무 곳 남짓. 경북에는 의성, 안동, 점촌, 김천 등 7곳 정도만 남아 있다. 반면 농가에서 가마솥을 이용해 전통방식으로 조청을 손수 제조하는 형태는 되레 증가하고 있다. 농식품부에서 지원하고 있는 마을기업·농업인 대상 소규모 창업기술시범 사업 덕분이다. 다행히 절벽으로 내몰리던 국내 전통 조청 산업이 새롭게 기지개를 켜고 있다. 봉화 고산협곡 산사에 사는 지욱 스님은 홍도라지 조청을 만드는 게 유명해져 지난해 KBS 인간극장에서 '금쪽같은 우리 스님'이란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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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에서 주목받는 두 명의 남성 한과 명인이 있다. 바로 김규흔과 최봉석이다. 김규흔은 국가 지정 전통 한과 제조 기능 명인 겸 대한민국 한과 명장 1호(약과 분야)다. 그는 '한가원'을 개관했다. 한가원은 국내에서 유일한 한과문화박물관. 최봉석은 국내에서 가장 핫한 곳으로 평가받는 강릉시 사천면 모래네 한과 마을에서 '갈골한과'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두 한과 명인이 지역의 한 조청 공장을 통해 재료를 매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명인도 안심하고 사용할 정도로 믿을 만한 조청이란 의미였다.

경북 경산시 자인면 읍천리 경일식품. 창업자 김규섭(76)이 만들고 있는 예청 조청이다. '예청(藝淸)'은 2013년 만든 경일식품의 식품 브랜드 명칭이다. 현재 두 명의 한과 명인을 비롯해 봉화 닭실한과, 의령 조청한과, 서산 생강한과, 보은 대추한과, 순창 문옥례 식품, 비비큐 치킨 등 전국 20여 군데에서 예청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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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청 외길 인생을 걸어 온 '경일식품' 김규섭 대표. 그가 경산시 자인면에서 운영하는 이 공장은 대구권 마지막 공장표 조청으로, 전국의 한과 명인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우여곡절 한국 조청산업

현재 대기업 조청이 중소기업 조청을 쫓아낸 상태다. 화학적 가공을 통해 저렴하면서도 단맛은 강하게 낼 수 있는 액상과당·가공감미료 등으로 불리는 물엿의 독점적 지배로 인해 영세한 조청업자는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조청 업자들은 호경기를 누렸다. 대기업이 지방으로 내려올 도로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던 탓도 있다. 특히 설 명절이 가져다주는 2개월의 조청 특수는 엄청났다. 이로 인해 관계자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대구의 경우 1975~80년에 30여 업체가 난립했다. 명덕네거리 근처에만 5곳, 태평로에는 3곳, 비산동에 3곳, 계대 앞, 수도산, 동촌, 칠성동 등지에 산재해 있었다. 이들 중 충남·남문·남부식품 등 3인방이 지역 조청 산업을 선도했다. 그 시절 조청 수요는 그만큼 대단했다. 조청이 흥할 때 국수 공장도 호경기였다. 이와 연장해 참기름, 방앗간, 떡집 등도 1천500여 개도 흥청거렸다.

시장 다각화 노력
대구 조청공장 한곳도 없고
전국 스무곳·경북 7곳 명맥
金 대표 두 아들 가업 승계
브랜드 개발·선물용 디자인
간편한 소포장 제품도 출시


하지만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직후 물량을 앞세운 기업형 사슴·공작·닭표 조청 등이 선제공격을 했다. 뒤이어 대기업 물엿 군단이 재래식 조청 공장을 압도해 버린다. 2010년 기준 대구에는 딱 한 개의 조청 공장만 남게 된다. 이제 고인이 된 김원도 사장이 운영했던 '신일식품'이다.

한국 조청산업도 우여곡절의 세월을 보낸다. 흥미로운 사실은 업자들이 오랫동안 쌀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늘 쌀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정부미 가격도 너무 들쭉날쭉했다. 연간 3번 정도의 파동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니 맘 놓고 쌀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업자들은 옥수수 혹은 쌀 싸래기 등을 이용해 조청을 제조해야만 했다. 경일식품도 2002년부터 겨우 쌀조청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2008년 7월11일 한국 조청 업계에도 희망이 찾아든다. 그날 금강산 관광을 하던 박왕자씨가 북한군에 의해 피격돼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로 인해 남북관계는 경색되고 북으로 맘대로 흘러가던 쌀이 일제히 스톱된다. 그로 인해 전국 쌀창고마다 쌀이 남아돌게 된다. 덕분에 업자들은 광복 이후 처음으로 마음껏 쌀로 조청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명문거유 집안 조청장수

반세기 조청 외길을 걸어온 김규섭 대표. 그는 명문 거유 집안 출신이다. 그의 13대조 방조 할배가 바로 학봉 김성일이다. 하지만 생계만은 누가 책임질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안동시 길안면 배방리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다. 지인과 동업을 했는데 기술이 없어 7년 만에 빈손이 되고 만다. 청송에서 태어난 그는 23세 때인 1968년 먹고살기 위해 맨손으로 대구로 온다. 그 어름부터 결혼하던 31세까지 일정한 직종 없이 날품팔이 신세를 면치 못한다. 철공소에도 들어갔고 길거리에서 소금, 사과, 병아리 등 별별걸 다 팔았다.

지인이 수성구 범어동 현재 범어 대성당 근처에서 '제일 제이소'란 조청공장을 괜찮게 운영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 공장에 취직할 수 있었다. 부산물로 나온 조청 찌꺼기를 근처 목장·양계장 등에 팔러 다녔다. 그때는 수공업 형태로 조청을 만들었다. 지름 1.5m 정도의 무쇠솥을 무연탄으로 가열해 조청을 만들었다. 그때는 직접 열이었지만 지금은 150~170℃의 보일러의 열기를 간접열로 활용한다. 그는 계명대 대명동 캠퍼스 근처 미도극장 옆 화신 엿 공장에서 5년 더 경험을 쌓는다.

그 이전 대구 시절에는 자기 브랜드도 독자적인 자본도 없었다. 남의 시설에서 임차경영을 하던 때였다. 1985년 9월 자신만의 조청을 만들기 위해 대구를 떠나 경산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후 경산 중산동, 다음엔 경산 2공단, 6년 전 청도 운문댐 수원과 맞물린 현재 자리로 이전한다.

그 시절에는 정체불명의 비위생적인 짝퉁 조청이 상당히 유통됐다. 당시 암갈색 조청은 탄 것이란 인식 때문에 잘 어필되지 못했다. 조금 노르스름한 빛깔이 더 잘 팔렸다. 그래서 악덕업자들은 아황산나트륨 등을 투입해 짝퉁 조청을 몰래 팔았다. 1980년대 중반, 보다 못한 지역의 조청 업자들이 모여 조합을 만들었다. 희망로 옆에 사무실도 개소했다. 가짜를 근절하기 위해 조합원의 조청부터 성분을 분석해 공개했다. 뚜껑을 열고 보니 '경일 조청이 짱'이란 평가를 받게 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비록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지만 조청의 질감만은 수제방식으로 관리하고 있다. 그래서 한과 명인들이 이 조청을 찜한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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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에는 농식품부가 주최한 쌀가공품 품평회에서 '톱10'에 선정돼 장관상을 받는다. 김 대표의 가업은 아날로그 방식이었다. 세상은 디지털 세상으로 돌변했다. 조청산업도 특화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김 대표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두 아들(기홍·시홍)이 자신의 직장을 버리고 가업을 승계한다. 홈페이지도 만들고 예청이란 브랜드도 개발하고 걸맞은 선물용 포장지도 디자인했다. 조청 다각화를 위해 '떡볶이데이'를 겨냥해 30g짜리 '꼬마조청'도 출시하기도 했다.

경일식품은 현재 조청 재료로 연간 2천t의 쌀, 1천t의 옥수수를 사용하고 있다. 쌀조청 이외에도 기능성을 보강하기 위해 생강 조청, 도라지 조청 등도 선물용으로 개발했다. 경산시 자인면 읍천리 300. (053)856-6724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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