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14) 이만택] 지역연극 정체성 확립하고 대가 반열에 오른 극작가

  •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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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7-12 07:46  |  수정 2021-08-23 11:48  |  발행일 2021-07-12 제20면

이만택
1969년 희곡집 '무지개' 출판기념회에서 이만택(오른쪽)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영남일보 DB〉

국어 교사로 지내며 쓴 창작극 '무지개'

사람 냄새 배어있는 민초의 삶과 허무주의 녹여내며 호평
국립극장 무대 오르며 대구 희곡사 새역사
34년뒤 대구시립극단 창단 공연 작품으로 지역관객과 만남


이만택(1920~2006)은 1960년대 자신의 희곡 작품을 국립극장 무대에 올리면서 무명에서 일약 대가의 반열에 오른 국어 교사 출신 극작가다. 이만택이 발표한 희곡 작품은 '난류' '무지개' '그 많은 낮과 밤을' '인간교향악' 등 네 편의 장막극과 단막극 '은하수에 정사한 견우직녀의 원혼은 아직도 방황하고 있다'를 포함해 총 5편이다.

특히 그의 희곡 작품 '무지개'는 외국 작품 일색이던 1960년대 당시 혜성처럼 등장한 창작극이기에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무지개'는 1964년 극단 신협과 한국일보가 공동 주최한 희곡 공모에 당선, 지역 극작가 작품으로는 매우 드물게 국립극장 무대에 오르며 대구 희곡사의 역사로 남았다. 이만택은 한 해 전인 1963년 국립극장 장막극 모집에서도 희곡 '난류'로 입선하는 등 극작가로서 가능성을 보였다.

당시의 전국 규모 공모는 극작가들의 등용문으로 정평이 나 있었고, 공모 당선은 전국적으로 인정받는 극작가 대열에 합류하는 것을 의미했다. 훗날 이만택은 1972년 단막극 '은하수에 정사한 견우직녀의 원혼은 아직도 방황하고 있다'를 끝으로 본업인 교사 일에 집중하며 남은 생을 보냈지만, 1998년 대구시립극단 창단 공연에도 자신의 작품 '무지개'를 올리며 '지역 연극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한 극작가로 지금껏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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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대구시립극단 창단 공연으로 무대에 오른 연극 '무지개'의 한 장면. 〈영남일보 DB〉

◆연극을 사랑한 문학청년

이만택은 1920년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려운 고문을 해석해 일본인 교사로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등 글쓰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주었다. 유소년기의 추억도 이만택을 극작가의 길로 이끌었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소설이나 희곡이나 표현 양식만 다를 뿐 담아내고자 하는 내용은 똑같은 게 아니겠어요? 그냥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어서 어린 시절 봤던 연극을 생각하며 희곡으로 썼어요"라고 밝힌 바 있다. 마땅한 구경거리가 없던 시골 마을에서 신파극단의 연극을 보며 상상력을 키웠다.

1934년에는 12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사범학교에 다닐 때도 글쓰기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대구사범 5학년 때 조선일보에 콩트가 실리면서 1개월의 구독권을 받기도 했다. 20세에 교직에 입문한 이만택은 영천 선화여고 교장을 끝으로 50년의 교직 생활을 마감했다. 이후 대구 중구 태평로 번개시장 인근 아파트에서 말년을 보냈고 생을 마감했다.

노년의 이만택은 세상을 떠나기 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난 평생 국어 선생을 했던 터라 지나치게 정돈된 문장을 만드는 것이 습관이 돼서 문단에 등단하기 힘들었어요. 인위적으로 다듬은 문장보다는 사람들의 삶이 녹아있는 구수한 문장이 더 좋은 문장이지요. 그래서 생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따스한 삶이 배어 있는 글을 쓰려고 노력했지요. 그러다 보니 되더라고요"라며 자신의 등단기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

이만택이 밝힌 등단기처럼 이만택의 작품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배어 있다. 그의 대표 희곡 작품인 '무지개'도 마찬가지다. '무지개'는 이만택이 신문기사에서 본 강원도 화전민의 생활에서 모티브를 얻어 집필한 작품이다. 소백산맥에 자리한 경상도의 한 산촌에서 화전을 일구고 살아가는 민초의 삶을 작품에 녹여냈다. 혈기왕성한 산촌의 청년은 두메산골을 탈출해 새 삶을 살아가려 하지만 결국 주인공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제자리로 돌아오고 만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허무주의적 구성은 당대 평론가들로부터도 니힐리즘(허무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됐다. 훗날의 이만택 역시 '무지개'에 대해 "작품의 무대는 현대문명과 격리된 경상도 화전민 부락으로 인간 생활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군상들의 갈등과 거기서 탈출하려는 젊은이의 갈망이 무지개로 상징된다고 볼 수 있으나 그 무지개는 금방 사라져버리는 허상이 아니겠는가?"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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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발간된 희곡집 '무지개'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 제공〉

◆독학으로 대가의 반열에 오르다

'무지개'는 1964년 6월부터 14회에 걸쳐 극단 신협에 의해 국립극장에서 공연됐다. 일주일 동안 매일 2회씩 공연됐지만 800석이었던 국립극장이 초만원을 이룰 정도로 많은 관객이 찾았다. 당시 출연진이 김동원 김승호 도금봉 황정순 조미령 장민호 김성원 등 당대 인기배우였던 점도 연극의 흥행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에도 '무지개'는 대전·목포·원주·대구·부산 등 지방에서도 순회 공연됐다. 1970~80년대에도 영남대 극단 천마무대, 극단 대구무대가 '무지개'를 대구 무대에 올렸다.

이필동 저 '새로 쓴 대구연극사'에는 연출가 이해랑(1916~1989) 선생의 '무지개'에 대한 평가가 남아 있다. 이 선생은 '무지개'에 대해 "현상모집에서 뽑힌 오리지널의 우수성, 올스타 출연, 여기다 생산적 연출 노력이 삼위일체로 작용해 '무지개'는 연극사에 남을 우수작품으로 평가된다"고 말하고 있다.

'무지개'는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 34년 후인 1998년 대구 관객을 다시 만난다. 대구시립극단의 창단 공연 작품으로 '무지개'가 선정됐기 때문이다. 당시 대구시립극단 이영규 감독은 창단작품 팸플릿에서 "대구시립극단이 지역 원로 작가의 작품을 창단 작품으로 올림으로써 지역 창작극의 활성화에 힘이 되고자 했다"며 작품 선정 이유를 밝혔다.

무지개
1998년 대구시립극단 창단공연 '무지개'의 프로그램북.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 제공〉

이만택은 1998년 대구시립극단 창단 공연 팸플릿에 "졸작 무지개가 대구시립극단 창단공연작품으로 선정된 것은 개인적으로 무상(無上)의 영광으로 생각한다"면서 "이제 막 싹이 돋아나는 시립극단에 물을 주고 북돋워서 정정(亭亭)한 거목(巨木)으로 키워 나갈 책무가 우리에게 있다. 대구시립극단이 찬란한 무지개와 함께 영원하기를 바란다"며 소감을 적었다.

지역 원로 연출가 김삼일은 극작가 이만택을 두고 "극작 수업도 받지 않은 채 스승도 없이 독학으로 대가의 반열에 오른 대단한 분이다. 셰익스피어 작품 등 번역작품이 주를 이루던 시절, 무명의 교사 출신 극작가의 작품이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특히 이만택의 작품 '무지개'는 인간적 이야기와 계몽성까지 담은 극사실주의 작품으로 차범석(1924~2006)과 같은 당대 유명 연출가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며 극작가로서 이만택의 업적을 평가했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 참고문헌=이필동 저 대구연극사, 월간 대구문화(2003년 2월). 이수남의 되돌아본 향토문단(2005년 8월18일자 영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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