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15) 이점희] 아들 하숙비도 못 대면서 예술에 재산 탕진...'오페라도시 대구' 초석을 놓다

  • 김봉규
  • |
  • 입력 2021-07-26 08:06  |  수정 2021-08-23 11:47  |  발행일 2021-07-26 제20면
1974년 대구오페라단장 맡으며 초연작품 무대 등 활발 활동...'오페라도시' 만들기에 일생 바쳐
음악 교육에도 열정적…마지막 염원이던 대구시립오페라단 창단 한해 앞둔 1991년 세상 떠나

2021072501000679700027022
1939년 일본의 세키야 오페라컴퍼니에서 제작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춘희)'에서 제르몽 역을 맡은 이점희.

1972년에 대구오페라협회가 결성됐다. 성악가(테너) 김금환이 초대 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이점희, 홍춘선, 성기용, 남세진, 김원경 등이 회원으로 활동했다. 1973년 창단 공연으로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를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강당에서 공연했다. 첫 대구산 오페라다. 1975년 12월에는 대구오페라단으로 이름과 기구를 개편하고, 이때부터 바리톤 이점희(1915~1991)가 단장을 맡았다. 이후 초연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대구오페라단은 1991년 이점희가 별세하면서 이후 한동안 활동을 중지하게 된다.


이점희3

대구에서 불기 시작한 오페라의 바람은 1992년 대구시립오페라단(단장 김완준)의 창단으로 이어지고, 이를 토대로 대구의 오페라는 발전을 거듭했다. 대구시립오페라단은 92년 10월 창단연주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벌이면서 대구가 오페라의 중심도시로 성장하는 기반이 됐다. 2003년에는 오페라 전용 극장인 대구오페라하우스가 개관, 한국오페라 역사의 한 획을 긋게 되었다.

성악가로, 교육자로 활동한 이점희는 지금의 대구 오페라가 있게 한 대표적 음악가 중 한 사람이다.

2021072501000679700027024
이점희 독창회(1995) 안내장 표지.

◆대구 클래식 음악 위해 일생 바쳐

성악가 이점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진정한 예술인' '진짜 예술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은 사람' '진심으로 지역 예술을 걱정한 사람'으로 회고한다.

1915년 일본 메이지(明治)대학교 법학과를 나온 아버지 이황룡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를 따라 교회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계성중 시절 작곡가 박태준의 지도 아래 축음기를 통해 카루소의 노래를 들으면서 더욱 음악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일본에서 할머니가 원하던 상업학교에 다니면서도 오직 음악에만 관심을 쏟던 그는 결국 가족 몰래 도쿄에 있는 음악학원에 다니게 됐다. 음악학원에서 만난 미무라 요시코(三村祥子)의 도움으로 동양음악학교를 거쳐 1939년 중앙음악학교 4학년 때는 세키야 오페라컴퍼니에서 제작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춘희)'의 제르몽 역에 뽑혀 출연하기도 했다. 중앙음악학교를 졸업(1940년)한 뒤 1946년에 귀국, 전주 전북중을 거쳐 1947년부터 계성중에서 근무했다. 1949년 대구공회당(현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제2회 독창회를 열었다. 1950년 대구음악학원을 개원했으며, 1952년에는 대구음악연구회를 발족하고 1953년에는 대구음악가협회를 결성했다. 1952년 개설된 효성여대 음악과 과장직을 맡았다. 1957년 대구교향악단의 창단 공연 때 출연했다. 1958년 조선대 음악과 교수로 부임했고, 그해 9월 광주중앙극장에서 제5회 독창회를 열었다. 1960년 광주사범대학(현 광주교대)을 거쳐 1964년 목포교대로 옮겼다. 1970년 3월 영남대 음악과가 개설될 때 교수로 부임해 1980년 정년퇴임 때까지 재직했다. 그의 제자들은 "후학들을 위한 교육에 열정적이었고, 언제나 힘이 넘치는 모습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2021072501000679700027023
대구음악학원 시절 제자들과 함께 한 이점희(앞줄 오른쪽 둘째). 이점희 왼쪽은 대구시립교향악단을 창단한 이기홍.

◆대구 오페라 운동 중추 역할

1972년에 대구오페라협회(회장 김금환)가 결성되고, 이점희는 지도위원으로 추대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74년 대구오페라협회가 대구오페라단으로 개편되면서 이점희는 단장을 맡았다. 요즘처럼 오페라에 대한 인식이 높은 것도 아니고 후원금을 받기도 쉽지 않던 시절이었던 만큼 한 편 한 편의 오페라 무대를 올리기까지 그가 기울인 노력은 아무나 따라 할 수 없었다. 남달랐던 '예술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의 셋째 아들 이재원씨는 "아버님이 대구지역의 음악운동에 한창 열정을 쏟으실 때 둘째 형님은 서울 생활 하숙비를 마련하지 못해 대학을 중도에 포기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그저 음악, 예술을 최고의 가치이자 목표로 삼아 평생을 사신 분"이라고 말했다.

대구오페라단은 지역 최초의 민간오페라단으로 초연 작품들을 발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다 1991년 그가 별세하면서 활동을 중지하게 되었다. 9년 후인 1999년에 그의 제자인 테너 김희윤이 독일에서 귀국해 조직을 정비, 명맥을 이었다. 그는 2008년 5월 '대구문화'와의 인터뷰에서 "학교 때 스승이었던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선생은 재산을 예술을 위해 다 쏟아부었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닐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대구 성악의 오늘, 대구 오페라의 오늘이 있는 것은 그분이 계셨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점희는 대구지역 무대에서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하고 발표했지만, 많은 사람이 그가 특히 즐겨 부른 노래로 슈만의 '두 사람의 척탄병'과 무소르그스키의 '벼룩의 노래' 등을 꼽는다. 묵직하고 엄숙한 느낌의 '두 사람의 척탄병'은 힘 있는 그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듯한 노래로 2001년 원로음악가회 주최 '20세기 대구음악 회고 음악회'에서 성악가 남세진이 그를 기리는 의미로 부르기도 했다. 풍자가 넘치는 노래인 '벼룩의 노래'는 평소 술과 예술, 그리고 사람을 좋아하던 그의 호탕한 성격을 잘 보여주는 노래라 할 수 있다.

1975년 회갑기념 제11회 독창회를 광주YMCA강당에서 열었고, 1986년 5월에는 국내 성악가로는 처음으로 고희기념 음악회(제13회 독창회)를 대구 어린이회관 꾀꼬리극장에서 열었다. '염원과 사랑과 생명을 위한 바리톤 이점희'라는 당시 독창회의 부제는 그의 음악 인생을 잘 정리한 표현이다.

1970~80년대에 대구 지역 음악대학에서 음악인들이 많이 배출되기 시작하자 그는 특히 그들이 열정적이고 안정적으로 오페라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시립오페라단 창단에 적극 나섰다. 20년 동안 오페라 운동에 매진했으나 안타깝게도 대구시립오페라단 창단(1992년)을 한 해 앞둔 1991년 세상을 떠났다.

음악뿐만 아니라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1987년부터 별세 직전까지 '희(熙) 화랑'을 운영하기도 했다. 아들 이재원씨는 "화랑에서 수익이 나면 그 돈을 음악에 투자하곤 하셨다. 오페라 운동에 힘을 쏟을 때만큼 행복해하셨던 적은 없었다. 대구시립오페라단이 창단되기 한 해 전에 돌아가셨다. 한 해만 더 사셨더라도 염원하시던 일을 보고 돌아가셨을 텐데, 그 점이 두고두고 아쉽다"라고 털어놓았다.

이재원씨는 2020년 5월 대구시에 이점희 관련 유품을 기증했다. 이점희가 제자들을 가르칠 때 사용했던 오래된 피아노를 비롯해 릴 녹음 플레이어, 전축, 연주복, 서예가 서경보 선생이 오페라에 대해 글을 써준 액자, 화가 백낙종 선생이 그려준 오페라 '춘향전' 포스터 원화, 음반, 사진 자료 등 다양하다.

이점희는 비록 마지막 염원이던 대구시립오페라단의 창단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존재는 대구가 음악도시·오페라도시로 자리를 굳건히 해가는 데 중요한 초석이고 원동력이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참고 자료 : '대구문화' 2008년 5월호
▨사진 제공 :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
공동기획 : 대구광역시

기자 이미지

김봉규 기자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문화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