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따라 상주 여행 .8] 전국서 유일하게 남은 은척면 우기리 동학교당

  • 류혜숙 작가·박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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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7-26   |  발행일 2021-07-26 제22면   |  수정 2021-07-26 08:23
"백성이 주인되는 세상을 꿈꾸며" 상주서 다시 빛난 동학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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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 은척면 우기리에 자리한 상주 동학교당.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은 동학교당으로, 김주희가 상주를 본거지로 정해 동학의 부흥과 포교에 노력하다가 1915년 지금의 자리에 교당을 세우고 교세 확장에 힘쓴 곳이다.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쪽에는 성주봉이, 맞은편엔 문경과 경계를 이루는 칠봉산이 둘러싸고 있는 땅, 경북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다. 마을 가운데에 초가 4채가 마당을 중심으로 정방형을 이루고 서 있고, 행랑채 가운데로 난 입구에 '동학교당(東學敎堂)' 현판이 걸려 있다. 구한말 흔들리던 이 땅에서 터져 나온 평등의 함성과 기울어 버린 국운을 일으켜 세워보려던 민초들의 자생적 의지가 맺혀 있는 저 '동학'이라는 이름. 이곳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은 동학교당이다.

#1. 상주 동학교의 설립

동학(東學)은 조선 철종 11년인 1860년 수운(水雲) 최제우(崔濟遇)가 창시한 종교다. 조선시대 봉건적인 신분제도에 반기를 들고 인간의 주체성과 만인평등사상을 내세운 자생 민족종교다. 초기 동학은 서민층에 유포된 단순한 신앙형태였다. 동학은 경주·대구·울산 등 14곳에 접소(接所)와 접주(接主)를 두고 조직화했는데, 포교 3년 만에 전체 교인의 수가 3천명에 이를 정도로 교세는 빠르게 성장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1864년 최제우를 체포해 '삿된 도로 세상을 어지럽힌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로 사형에 처했다.

최제우의 뒤를 이은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은 지하에 숨어 다니면서 동학의 포교에 힘썼다. 1880년대에 들어서 삼남 일대를 장악하게 되고,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포교의 자유를 인정받기 위한 교조신원운동을 본격적으로 제기하면서 반봉건·반외세의 성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동학은 북접과 남접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북접은 최시형을 위시한 동학의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는 온건파 세력들이 이끌었으며, 남접은 전봉준(全奉準) 등 동학에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진 급진파 세력들이 이끌었다.


우금치전투서 동학군 활약한 김주희
김낙세와 합심 우기리에 교당 건립
경전간행사업 등 대대적 교세 확장
1943년 日帝 기습에 300여명 끌려가



이러한 가운데 1894년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지나친 폭정에 농민층의 분노가 폭발하게 된다. 이에 전봉준을 위시한 남접의 동학 교인들이 지도자의 위치에서 무력투쟁을 전개한다. 동학농민운동이다. 그들이 외친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 축멸왜이(逐滅倭夷), 진멸권귀(盡滅權貴)는 동학운동이 혁명적인 사회개혁운동으로 전환되었음을 말해 준다. 하지만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궤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고, 이후 남접의 지도자들은 대거 체포돼 처형되었다. 북접 교주 최시형 역시 도피생활 중 1898년 원주에서 체포돼 참형되었다. 3대 교주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천도교(天道敎)가 창시되는데, 이념과 정치적인 성향에 따라 다양한 교단으로 분파를 하게 된다.

동학군으로 활약했던 사람 중에 충남 공주 출신의 김주희(金周熙)가 있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천(敬天), 호(號)는 삼풍(三豊)으로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부터 동학에 입도한 그는 우금치 전투에서 살아남은 후 속리산에 들어가 은거하며 수도했다. 그는 천도교로 개칭한 손병희의 이념이 최제우의 사상과 어긋난다고 생각했고 스스로 남접이라 칭하며 포교를 시작했다. 1904년경에는 십승지의 하나로 알려진 상주 화북면 장암리로 들어가 경천교(敬天敎)를 조직하고 포교활동을 이어나갔다. 김주희는 최제우의 동학 이념을 계승하는 동학교 설립에 뜻을 가지고 있었다. 길을 모색하던 중 1910년 무렵 양반 신분의 김낙세를 만나 동학교를 설립하기로 합의한다. 마침내 1915년 6월 상주 은척면 우기리에 교당 터를 잡았다. 상주 동학교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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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동학교당 중심 건물인 원채(위)와 남교도가 사용한 행랑채.
#2. 상주 동학교당

상주 동학교당 입구 기둥에 '경주금척동학포태(慶州金尺東學) 상주은척포덕천하(尙州銀尺布德天下)'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 '경주 금척에서 동학이 처음 일어나고, 상주 은척에서 널리 전파됐다'는 말이다. 그 옆으로 '덕을 널리 베풀고 후천운수가 열리기를 기원하며 국기를 바로 세워 백성들을 편하게 한다'는 동학의 기본이념이 쓰여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마당을 중심으로 동, 서, 남, 북재 4동의 건물이 사방에 배치돼 있다. 중심 건물인 북재는 원채·성화실, 사랑채인 동재는 접주실, 안사랑채인 서재는 남녀교도가 각각 반씩 사용했으며, 행랑채인 남재는 남교도가 사용했다. 서재 뒤에 경전 간행소로 쓰였던 별채가 있었는데 소실됐다.

교당 전체가 완성되기까지는 3년이 걸렸다. 1922년에는 일제의 문화정책에 따라 조선총독부로부터 보수적인 종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그 과정은 매우 까다롭고 복잡했으며 인가 후에도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동학교는 전도사를 각지에 파견해 교세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이 무렵부터 동학 경전, 가사 등 대대적인 간행사업을 벌이며 이념 위주의 교세 확장을 꾀했다. 김주희는 초기 동학의 연장선상에서 '하늘의 뜻을 이어 근본을 세운다'는 '계천입극(繼天立極)'을 목적으로 했다. 국가와 백성이 위태로울 때마다 온몸을 던져 구국(救國)·구민(救民)한 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동학이다. 그에 비해 상주 동학은 만인평등, 인본사상, 인간존중 등의 동학 정신을 대대손손 전하기 위해 경전 간행사업에 주력했다. 이는 '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꿨던 또 하나의 동학이었다. 1928년에는 교도 수가 1천500명에 달했고 이러한 교세는 1931년까지 유지되었다. 그 후 1936년 일제에 의해 공인 취소돼 해산 통보를 받았다. 교인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밤에 몰래 모여 별채 가운데 방에 거적을 걸쳐 빛을 가린 채 숨죽여 작업했다.

1943년 일제는 상주 동학교당을 기습했다. 그날은 음력 10월28일로 최제우의 탄신일이었다. 교인들은 상투를 잘린 채 상주경찰서로 줄줄이 끌려갔다. 이날 구치소에는 300여명의 교도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부주교 김낙세는 1944년 9월 고문으로 옥중 사망했다. 김주희는 충격으로 곡기를 끊고 그해 12월28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때가 되면 다 된다. 걱정마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동학교당 가장 안쪽에 근래에 세운 듯한 천황각이 있다. 주련에 '방방곡곡행행진/ 수수산산개개지/ 송송백백청청립/ 지지엽엽만만절'이라 쓰여 있다. 이는 최제우가 쓴 동학의 기본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에 나오는 화결시(和訣詩)의 일부다. 그 뜻은 이러하다. '방방곡곡 돌아보니 물마다 산마다 낱낱이 알겠더라. 소나무 잣나무는 푸릇푸릇 서 있는데 가지가지 잎새마다 만만 마디로다.' 동학교당은 경북도 민속문화재 제120호로 지정돼 있고 지금도 김주희의 후손들이 교당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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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동학교당 바로 옆에 있는 유물전시관. 일제에 압수당했던 교기, 의례복, 동학경전, 판목 및 당시 생활용품 등을 회수해 전시해 놓은 곳이다.
#3. 상주 동학교당 유물전시관

동학교당 바로 옆에 유물전시관이 있다. 일제에 압수당했던 교기, 의례복, 동학경전, 판목 및 당시 생활용품 등을 회수해 전시해 놓은 곳이다. 전시관 중앙에는 '창생을 질곡에서 건져내고 지상천국을 열어 국권을 바로 세우는 것이 동학의 최대 목표'임을 천명한 포교 이념이 김주희의 영정과 나란히 걸려 있다. 유물은 총 289종 1천425점인데, 동학경전을 비롯한 전적류 131점, 동학경서나 가사 등을 나무에 새긴 판목 792점, 의복류 31점, 교기와 인장 등이 130점 등 총 1천84점이 경북도 민속자료 제111호로 지정돼 있다.

동학 관련 유물이 온전히 보전된 곳은 상주 동학교당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 특히 기록물의 사료적 가치와 의의는 대단히 높다. 이는 상주 동학의 차별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구한말 격동기에 상주 동학이 취한 반일 의식과 민족운동의 실상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또한 방대한 가사는 국문학 특히 가사문학의 보고라 할 수 있으며 종교문학과 민족문학, 서민문학 연구 및 동학사상 연구에도 크게 기여하는 자료라 할 수 있다. 100년 이상의 세월이 무색하리만치 선명한 각자용 한자와 한글, 조판대, 조판 재료함 등 각종 인쇄용구가 소장돼 있어 우리의 고유한 인쇄문화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데도 긴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상주시 누리집. 한국콘텐츠연구원 누리집. 문화재청 누리집. 김문기, 상주 동학교당 기록물의 사료적 가치,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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