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16) 이상정] 그의 동생은 민족시인 이상화이고 아내는 최초의 여류비행사 권기옥이었다

  • 박진관
  • |
  • 입력 2021-08-09 08:05  |  수정 2021-08-23 11:43  |  발행일 2021-08-09 제20면
지역화단에 서양화 처음 소개, 대구 최초 현대시조작가이자 미술교사…민족·미술교육에도 힘써
대구 사회주의 독립운동단체 창립·활동하다 만주로 망명 항일운동...韓 첫 여류비행사와 결혼
2021080701000219300008862
1942년 10월25일 중국 충칭에서 제34회 임시의정원회의를 마친 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맨 뒷줄 가운데 콧수염을 기른 인물이 이상정(원안)이다. 김구, 김원봉, 이시영, 조소앙을 비롯해 김상덕, 한지성, 이정호, 유림 등 대구경북 출신 독립지사도 함께 보인다.
이상정은 민족시인 이상화의 맏형으로 대구 출신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예술인으로선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시조와 산문에 뛰어난 문필가이자 서예가, 전각가, 서양화가였다. 특히 대구 최초의 서양화가요, 최초의 도화(미술)교사였다.

청남(晴南) 또는 산은(汕隱) 이상정(1897~1947)은 대구부호인 금남 이동진의 차남 이시우와 김신자 사이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으로 상화, 상백, 상오가 있다. 이들 네 형제는 각각 용·봉·인·학(龍鳳麟鶴)으로 알려진 걸출한 인물이다. 이상정이 12세 때 부친이 별세하자 그와 형제들은 조부와 백부 소남 이일우의 슬하에서 성장했다. 형제들이 어릴 적 태어나고 자란 곳은 현재 대구 중구카페 '라일락뜨락 1956'을 비롯한 주변이다. 조부 금남은 대구 최초의 사립도서관이자 교육기관인 우현서루를 설립했으며, 장남인 소남이 이를 계승해 민족지도자들을 양성했다.

이상정
◆독립운동가로서의 생애

이상정은 1910년초 일본으로 유학해 세조(成城)중학교와 도쿄 가쿠슈인(國學院)대학에서 역사, 미술, 상업, 군사 등 신학문을 배웠다. 1917년 귀국한 그는 대구 계성학교 도화교사로 재직했다. 1919년 3·8대구독립만세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돼 대구를 떠나 평안도 정주 오산학교, 평양 광성고보, 서울 경신고 등지에서 역사, 지리, 수학, 한문, 습자, 미술 등을 가르쳤다.

이상정은 대구에서 조직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단체 용진단(勇進團)을 창립해 활동하다 1925년 용진단의 서울 종로 적기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돼 그해 만주로 망명했다. 이후 허베이성 장자커우(張家口)에서 만주 군벌 펑위샹(馮玉祥)부대 소속으로 항일전쟁을 펼쳤다. 이때 독립운동가이자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 권기옥과 결혼했다.

이상정은 30년대 중국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소장) 교수로 활동했다. 40년대부터는 충칭 임시정부에도 적극 참여해 경상도 임시의정원 의원과 외무부 외교연구위원으로 선임됐다. 그는 좌파 민족주의 계열의 조선민족전선연맹 창립을 주도하고, 임정 산하 역시 좌파 민족주의 정당 신한민주당과 광복군 창립에도 기여했다. 이상정은 1945년 광복 후 상하이에서 한인 권익 보호에 진력하다 47년 모친상을 당해 9월에 귀국했다. 하지만 다음 달 뇌일혈로 별세했다. 그의 장례는 대구시민장으로 치러졌으며, 68년 건국훈장, 77년 독립장을 수훈했다.

26661.jpg
이상정 '청금산방인원'
◆대구 최초 서양화가로서의 삶

이상정은 어릴 적 조부와 백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일본으로 유학해 서양미술을 처음 접한 이후부턴 대구 화단에 서양화를 처음 소개했다. 계성100년사에는 그가 1917~1919년 계성학교와 신명학교에서 도화(圖畵) 즉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미술 등을 가르쳤다고 나온다. 당시 대구 수채화가 1세대인 서동진은 1918년 계성학교에 입학, 이상정의 제자가 된다.

이상정은 최종철, 남정구, 서만달 등과 1920년 5월 남선(남조선)을 개발하고 사회를 공고히 하자는 명목으로 대구청년회를 발족했는데, 거금 250원을 내기도 했다. 대구청년회는 각종 강연과 체육(야구, 정구, 축구)대회를 주관했으며 대구부민 3천여명이 거금 6천여원을 모았다.

이상정 유고 후 목우 백기만의 주도로 이상정의 중국생활 등을 담은 '중국유기'(1950·청구출판·이호우編)가 출간됐다. 중국유기에 보면, 이상정은 1921년 서양화 개인전을 열었다고 나온다. 하지만 당시 언론에선 장소와 날짜가 명확하지 않고 어떤 작품, 몇 점을 출품했는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1923년은 이상정이 이여성 등과 함께 대구에서 미술과 관련해 활발한 활동을 한 해다. 그는 그해 5월 교남서화연구회(회장 석재 서병오)가 대구노동공제회관에서 주최한 대구미술전람회(11.12~17) 서양화부에 <수, 광부, 지나정, 지나사원, 청도에서, 초상, 고향의 가을, 목욕, 한, 모자, 상상의 영운, 챈 치오래, 만주리에서, 무답, 화, 대지의 비, 이 마음, my dear miss> 등의 제목이 달린 작품 가운데 13점을 출품했다. 이 작품 중 지나정, 지나사원은 차이나(중국)의 정자와 사원을 뜻하며 만주리는 내몽골지역이다. 작품 제목으로 봐 이상정이 이 일대를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아일보(1923.11.17)는 이 전람회에 대해 "남국의 정조(情調)와 풍토를 가진 곳(대구)에서 처음 표현되는 예술의 빛이다. 무료입장이며 매일 500~600명씩 관람해 좁은 공제회관이 터져나갈 정도로 성황"이라고 보도했다.

1923년 12월14일 이상정은 그의 주도로 이여성, 박명조, 황윤수, 상계도, 정유택 등 5명을 모아 대구 군방각(중화요리 집)에서 '푸른 눈동자'란 뜻의 미술연구 단체인 벽동사(碧瞳社)를 창립했다. 벽동사는 매달 1회 모여 회비를 내고 연구뿐만 아니라 실습, 전시를 통해 창작 의욕을 고취했다. 제작 과목은 의장화, 초상화, 도안화, 간판화, 유화, 광도화 등이다.(매일신보 1923.12.25) 벽동사는 27년 대구 '0과회' 30년 '향토회'로 이어진다.

벽동사는 대구지역 최초의 서양화 연구단체라고 보면 된다. 당시 동아일보 12월21일자 신문에는 "벽동사는 대구 서성정(1정목 89번지)에 있으며, 14일 대구에 주재하는 각 신문사 기자를 초청해 피로연을 개최했다"고 보도했다.

이상정은 1924년 6월28~29일 대구소년회 주최로 양일간 열린 아동미술전람회에 심사를 맡는 등 대구지역 어린이들의 미술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대구소년회 창립 1주년 기념식 때 용진단 단원이 3명이나 축사를 한 것으로 봐 단장인 이상정이 주도해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이상정은 대구지역 청년, 소년단체를 창립해 민족교육을 하고 미술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상정의 수채화나 유화작품이 남아 있는 것은 없다. 기록을 통해서만 최초의 전시회와 작품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날 뿐이다.

◆유고(遺稿)시조와 산문, 전각 작품

이상정은 1922년 8월 '개벽' 잡지에 시조 두 편을 발표하기도 한 대구 최초의 현대시조 작가다. 그는 또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기간 풍찬노숙을 하며 많은 한시(漢詩)와 시조를 남겼다. 특히 '표박기(漂泊記)'는 25년 망명 후 33년까지 중국을 주유하며 쓴 수백 편의 시조와 산문을 엮은 책이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망명의 슬픔,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사연을 명문장에 담아내고 있다.

이상정은 1936년 자신의 전각작품을 직접 찍어 책으로 만든 청금산방인원(聽琴山房印苑)을 남겼다. 도장이 찍힌 이 인보(印譜)는 모두 198쪽으로 인영(印影)이 239점이다. 한학과 서예의 소양을 바탕으로 빼어난 글씨 및 전각 실력을 엿볼 수 있다. 지난 2월9일부터 5월30일까지 열린 대구미술관의 '때와 땅'전에 이상정의 작품이 전시된 바 있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공동기획 : 대구광역시
기자 이미지

박진관 기자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문화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