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17) 이육사] 17회에 걸친 옥살이...수인번호 264의 저항문학은 그렇게 피어났다

  • 최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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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8-23 07:47  |  수정 2021-08-23 11:39  |  발행일 2021-08-23 제20면
안동 도산면서 퇴계 14세손으로 출생...대구기반 항일 활동·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생활도
조선銀 대구점 폭탄투척사건 연루돼 복역…고향 추억·광복 염원 '육사시집'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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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육사(1904~1944)는 일제탄압에서도 저항문학을 꽃피웠다. 대부분 문학인이 자의 또는 타의로 친일에 나섰기에 그의 활동은 눈에 띌 수밖에 없다. 그는 항일운동을 위해 우리나라와 중국을 오가고, 체포와 출소를 반복하는 삶을 살면서도 독립을 향한 강인한 의지를 실천으로 보여줬다.


◆1920~1930년대 대구 기반 활동

이육사는 1904년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현재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서 이가호와 허길 사이 둘째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이원록으로, 어렸을 때 이름은 원삼이었다. 외할아버지 범산 허형은 왕산 허위의 동생이다. 만주로 가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외삼촌 허발과 허규 또한 독립운동가다. 육사는 퇴계 이황의 14세손으로 어린 시절 조부 이중직으로부터 '소학' '논어' '맹자' 등을 공부하며 한학을 접하게 된다.

육사의 집은 1916년 할아버지가 별세한 이후 가세가 기운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 이육사의 가족은 안동군 녹전면 신평동으로 이사했다.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육사는 만 16세가 되던 1920년 형 원기, 동생 원일과 함께 대구로 갔다. 대구에서 지낼 당시 육사는 서화가로 이름을 떨친 석재 서병오에게 그림을 배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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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시인을 기리는 '264작은문학관' 건물 전경.
1921년 결혼 후 이육사는 영천 처가 인근의 사립학교인 백학학원에서 공부했고, 1924년 4월 일본 유학을 떠났다. 이듬해 귀국한 육사는 대구 달성공원 입구에 있는 조양회관을 드나들었다. 당시 조양회관에는 대구구락부, 동아일보지국, 청년회, 대구운동협회, 대구여자청년회 농촌사 등이 둥지를 트는 등 각종 문화운동단체들이 모여들었다.

1937년 서울 종로구 명륜동으로 가족들이 이사하기 전까지 이육사는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했다. 경찰 기록과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 예심결정서를 종합하면 그는 가족과 함께 대구부 남산정(현재 남산동) 662-35에 살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아버지 이가호의 편지에 따르면 이후 서울에 가기 전까지 대구에선 남산동 일대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육사는 기자로도 활동했다. 1930년에는 중외일보 대구지국에서, 1931년에는 조선일보 대구지국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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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이육사 문학관 주변에 세워진 이육사 동상과 그의 대표작 '절정(絶頂)'이 새겨진 시비. <영남일보 DB>
◆독립운동가로서의 이육사

이육사가 독립운동을 시작하게 된 시기는 1925~1926년쯤으로 추정된다. 그는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로 활동했다. 당시 작성된 예심결정서에 따르면, 육사는 1925년 9월 137명의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에 참여하기도 한 이정기를 중심으로 비밀결사에 참가했다.

1927년 이육사와 그의 형제는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투척사건에 연루돼 1년 반 정도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당시 그의 수인번호는 264번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그의 필명인 이육사가 유래했다.

이육사는 1931년 레닌 탄생일을 기해 대구에 격문이 뿌려진 '대구격문사건'과 관련해 1931년 1월20일쯤 구속돼 2개월 정도 복역하다 석방된다. 당시 일본 경찰은 항일운동의 확산을 막으려 요주의 인물들을 대거 구속했는데 이육사도 포함됐다.

석방 후 그는 만주를 드나들며 활동 방향을 잡았고, 1932년 5월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의 창립멤버이자 핵심 요원인 윤세주를 만나 난징으로 간다. 이후 의열단을 이끄는 김원봉이 1932년 10월 개교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이하 조선혁명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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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비 여사가 육사 시인이 살았던 대구시 중구 남산동 662-35에 서 있다. 그녀는 선친의 생거터가 보존되길 원했다.
그는 1933년 7월 국내에 들어왔는데, 일제가 조선혁명간부학교 출신들을 일제히 검거하면서 이듬해인 1934년 3월 체포됐다. 이후 그는 중국 베이징을 오가며 항일 투쟁을 이어간다. 이때 일제에 저항하는 작은 사건이라도 터지면 이육사는 일본 관헌의 예비 검속 대상이 되었고, 형무소 출입을 하는 건 다반사였다.

1943년 이육사는 모친과 맏형의 소상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했는데, 이때 일본 헌병대에 의해 체포됐다. 그는 베이징으로 압송됐고, 1944년 1월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한다.

이육사가 항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건 집안의 영향도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0년 경술국치 당시 육사의 할아버지 이중직은 나라가 망한 상황에 같은 민족인 조선인을 종으로 부릴 필요가 없다며 집안의 남녀 비복을 모두 풀어준다. 송상도의 '기려수필'에 따르면 나라에 벼슬한 실적이 있는 선비로 경술년 국치에 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모두 18명인데, 그중 안동 사람으로 육사의 가까운 일가인 향산 이만도, 이남규, 이중언이 포함됐다.

이육사청포도문학공원(db)
포항시 남구 청림동 청포도문학공원 인근의 주택 벽면에 이육사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영남일보 DB>
◆시뿐만 아니라 평론·수필도 발표

이육사의 시는 40편 정도만 남아 있다. 그의 사후인 1946년 동생 이원조가 '육사시집'(서울출판사)을 발간하면서 이육사의 시 세계를 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그의 시에는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추억과 향수,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 쫓기는 자의 고독감이 담겨 있다.

이육사는 1930년 조선일보에 이활이라는 필명으로 낸 시 '말'을 시작으로 시를 발표한다. 그가 시를 발표하던 시기는 독립운동가로서 저항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때였다. '광야' 또한 일제 탄압이 날로 심해지는 가운데 썼던 시다. 이 작품은 발표되지 못하다 광복 후인 1945년 12월17일자 자유신문에 그의 다른 시 '꽃'과 함께 발표됐다.

이육사를 대부분 시인으로 알고 있지만 활동은 광범위했다. 1930년대 중반 이육사는 주로 시사평론을 썼는데, 여기선 그의 시대 인식이 드러난다. '오중전회를 앞두고 외분내열의 중국정정' '위기에 임한 중국의 전망' '중국농촌의 현상' 등의 시사평론에선 이육사의 중국 정치와 사회 현상, 세계정세에 대한 그의 식견을 엿볼 수 있다.

문학평론도 5편 남겼다. 이 가운데 '노신 추도문'은 중국 대문호 루쉰에 대해 논한 것으로 1936년 10월19일 루쉰 사망 소식을 접하고 같은 달 23일부터 29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한 글이다. 그가 쓴 수필로는 '계절의 5행' '연인기' '산사기(山寺記)' 등 10편 정도가 있다. 여기에는 그의 취향, 동서양 문학에 대한 소양 등이 담겨 있다.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일제가 억압하자 이육사는 이에 대한 반발로 한시(漢詩)를 짓기도 했다. 1943년 봄 발표된 '근하석정선생육순' '만등동산' '주난흥여' 등 3편의 한시가 남아 있다.

39년8개월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이육사는 문단에서 자신을 내세운 적은 없었다. '들개에게 길을 비켜줄 수 있는 겸양을 보일지언정 정면으로 달려드는 표범을 겁내서는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지 않으려'(수필 '계절의 5행' 중)했을 뿐이다.
최미애기자 miaechoi21@yeongnam.com

▨ 참고문헌=이육사 평전(푸른역사), 한국현대시연구(국학자료원), 한 권에 담은 264 작은문학관, 이육사(건국대 출판부)
공동기획 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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