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완의 디자인 생각] 리페어 컬처…고치는 것보다 새것이 더 쉽고 편한 세상의 그림자

  • 정재완 북디자이너·영남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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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8-27   |  발행일 2021-08-27 제36면   |  수정 2021-08-27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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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 대안동 북성로공구박물관이 '기술예술융합소 모루'란 이름으로 확장 이전됐다. 북성로와 동고동락한 온갖 공구의 연대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영남일보 DB〉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주말 내내 마당에서 수도를 고치셨다. 분수처럼 물이 솟구칠 때는 무지개가 보였고, 흠뻑 젖은 정원 식물들이 초록을 뿜어내는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올해 초봄 우리 작업실에 들른 수도 검침원이 마당 수도 누수를 의심했다. 고지서에 찍힌 놀라운 금액을 확인하고 나서야 땅을 파보니 수도관 연결 부품 하나가 깨져서 물이 계속 새고 있었다. 기술자는 이런 일이 흔하다며 부품을 교체하고 돌아갔다.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일어난 고장을 발견하고 고치는 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한번은 휴대전화기가 고장이 나서 AS센터에 고치려고 갔더니 직원은 부품을 교체하고 수리하는 비용보다 새것을 구입하는게 더 싸다며 기기 변경을 권유했다. 심지어 공짜 기기도 있는데 구형 모델을 아직까지 쓰냐며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보듯했다. 또 한번은 전기밥솥 내부 코팅이 벗겨져서 솥을 바꾸려고 판매점에 갔는데 역시나 그냥 밥솥을 새로 사는 게 더 낫다며 판매원은 신제품의 기능을 열심히 설명해줬다. 거기에는 기차 소리와 새소리, 밥이 되었다고 알려주는 음성지원도 있고 밥솥으로 그다지 해먹을 일도 없는 이런저런 요리 기능까지 있었다. 그날 나는 솥을 사러 갔다가 결국 전기밥솥을 샀다. 에어컨도 냉장고도 대개 고치러 갔다가 새것으로 바꾸게 된다.


어릴적 고장난 가전제품 해결 전파사
갈수록 신제품 주기 짧아져 새것 교체
물질·경제적 풍요, 고치는 기술 소홀

기술 장인·공구상 밀집, 대구 북성로
소중한 유무형 산업유산 '리페어 거리'
재개발 붐, 기술생태계 존립 위협도

내 주변 고장난 물건 고쳐쓰기 습관
고장난 지구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예전에는 전자제품이 고장 나면 동네에 있는 전파사에서 고쳐 썼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대기업 서비스센터가 잘 마련되어있기는 하지만 무용지물일 때가 많다. 신제품 생산 주기가 빨라지면서 제품이 금세 단종되고 부품 구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제품은 처음부터 고치지 못하도록 만든다고 한다. 어쨌든 고치는 것보다 새것을 사는 게 쉬워졌다.

리페어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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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M. 헤클이 쓴 '리페어 컬처'는 '고쳐서 쓰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물리학자이자 국립독일박물관장인 저자는 물건을 고쳐 쓰는 데에 열중하며 '리페어 카페'에서 공동체와 교류한다. 책은 현재의 소비 패턴이 어떤 문제점에 직면해있는지 그리고 미래를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는 산업화 이후 생산성과 효율성만을 고려한 단계적 공정 시스템이 사물의 전체적 구조를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주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현대사회의 분업화된 전문성은 결국 통합된 사고를 가로막는 요인이 되었다. 이것은 세분화되어 있는 학문이 분야별 성과를 이루기는 했지만, 이를 융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저자는 또 기업의 '의도된 노후화 전략'을 의심스럽게 바라본다. 새로운 제품을 디자인하면서 이전 제품과 호환이 되지 않는 부품을 사용하거나 일체형 디자인을 적용함으로써 소비자가 고장난 제품을 고쳐 쓰지 못하고 결국 새것을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소비 경제 논리를 비판한다. "효율성을 높이고 더 값싼 재료를 쓰면서 우리 사회는 점점 더 쓰고 버리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이런 사회는 수명이 긴 제품을 더는 가치있는 물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고쳐쓰는 것 또한 무의미한 태도로 간주해버린다." (책 87쪽) 이런 상황 속에서 소비자는 원하지 않더라도 전자제품 쓰레기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저자는 문제의 해결 방법으로 고쳐 쓰기를 주장하는데, 고쳐 쓰는 문화가 우리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물질적인 것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곧 인간으로서의 나에 대해서도 뭔가를 말해준다." (책 100쪽) "직접 무언가를 고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물건은 진짜 여러분의 것이 될 것이다." (책 133쪽) 사물의 단순한 교환가치를 넘어서 사연이 깃든 증여가치를 만들어 내는 일은 사물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더욱 특별하게 설정해준다. 손뜨개로 만든 모자나 목도리,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옷을 리폼한 것처럼 손수 만든 사물과 내 손으로 직접 고친 사물은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르는 여타의 제품과는 분명히 다르다.

고치는 일이 사물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라는 저자의 통찰을 넘어서 나는 사람과 공간, 사람과 시간 사이의 정서적 교류를 경험한 적이 있다. 몇 년 전 아내와 나는 낡은 한옥을 고쳐서 출판사 사무실 겸 작업실로 쓰기로 했다. 처음 한옥을 봤을 때에는 마당을 가득 채운 불법 증축 구조물 때문에 동선이 복잡했고 천장 누수도 있어서 온전히 사용하기 힘들었다. 오래된 집은 여기저기 아픈 상태였다. 집을 고치는 것이 결코 녹록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치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장소에 대한 애착이 생기게 되었다. 집이 처음 지어진 1947년의 시간과 고쳐지는 2018년의 시간이 같은 장소에서 겹쳐진다고 생각하니 마당의 돌조각 하나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문화재 조사 연구원으로부터 이 마을이 청동기시대 고인돌 터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까마득한 과거 조상과 내가 연결되어있다고도 생각했다. 오래된 좁은 골목길을 도시의 실핏줄에 비유한 건축가의 표현처럼 어느덧 집과 마을은 거대한 생명체로 다가왔다.

목조주택을 고치는 일은 까다로웠다. 목수는 나무의 약하거나 썩은 부분을 튼튼한 목재로 끼워 맞추는 작업이 기둥 전체를 새롭게 교체하는 일보다 정교하고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근처 재개발 지역의 이주하고 남은 폐가에서 애자(뚱딴지)와 나무 등을 떼어와 부족한 재료를 보충하기도 했다. 역시 나무의 생명력이란! 오래된 한옥을 고치기 위해 쓰인 재료는 수십 년 동안 어쩌면 수백 년 동안 마을에 머물던 것들이었다. 건축사 사무소 오피스아키텍톤의 조언과 도움 그리고 설계 디자인을 통해서 한옥은 마을의 오랜 시간을 품은 채 근사한 사무공간으로 완벽하게 탈바꿈했다. 우리에게 집을 고치는 것은 재료의 수명을 연장하는 일이었다. 아픈 집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었다. 그리고 쓰레기를 덜 만드는 일이었고 지구에도 좀 덜 미안한 건축행위였다.

고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뿐더러 특히나 집을 고치는 경험이 일반적일 수는 없다. 안타깝게도 물질적·경제적 풍요로움은 우리가 고치는 기술을 배우고 가르치는데 소홀하도록 만들었다. 그럴싸한 물건이 싼 값으로 쏟아지는 시대이니 돈을 벌어서 새것을 구매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수많은 물건에 잠식당하면서 어느덧 우리는 그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알지 못하고 더는 궁금해하지도 않게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고 집을 꾸미는 데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끊임없이 제품을 구입하는 중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제품의 가격과 성능을 검색하고 결제하며 별점을 주고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내가 직접 손봐야 할 일들은 차고 넘쳐난다. 전구를 갈아 끼우거나 끄덕거리는 의자의 나사를 조이는 일은 비교적 간단하다. 고장난 방문 손잡이나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수전의 부품을 교체하는 일은 조금 어렵다. 나처럼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리페어 카페다. 국내에는 서울새활용플라자에 리페어 카페가 있다. 이곳에서는 '손으로 내린' 드립커피를 마시며 기술장인의 도움을 받아 고장난 전자제품을 고치는 행사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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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일본인, 그리고 훗날 북성로산업1번지를 위해 공헌해온 기술자들의 체취가 묻어있는 일제 적산가옥의 묘한 뉘앙스. 〈영남일보 DB〉

대구에서는 북성로가 떠오른다. 기술장인과 공구상이 밀집해 있는 곳이니 그 자체가 '리페어 스트리트'다. 특히 '훌라(HOOLA)'가 운영하는 '기술예술융합소 모루'는 북성로라면 뭐든지 만들 수 있고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실천하며 시민들과 함께 하는 만들기 워크숍도 꾸려가고 있다. 물건을 고칠 수 있는 사람-기술-시설은 완제품에 익숙해진, 그래서 손의 감각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중한 유무형의 산업 유산이다. 그러나 북성로의 역사와 활동가들의 땀나는 노력이 무색하게도 이곳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재개발 공사가 한창이다. 대규모 주거단지는 북성로 기술생태계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북성로를 '리페어 거리'로 만들고 지속가능한 도시를 만드는 과감한 실험을 해보면 어떨까. 평범한 일상에서 고쳐 쓸 것은 넘쳐난다. 사람이 모이는 리페어 거리는 단순히 고장난 물건을 고치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미래의 소비, 그리고 지속가능한 사물에 대한 토론의 장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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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완 (북디자이너·영남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고치는 것보다 새것이 더 쉽고 편한 세상이 되었다. 새것에 대한 우리의 욕망은 일상의 제품에서부터 거대한 도시로까지 번진다. 도시도 고쳐쓸 수 있을까? 새것을 만드는 일도 훌륭한 디자인이지만, 고치는 일도 그에 못지않은 디자인이다. 어쩌면 훨씬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디자인이다. 생각해보니 심지어 인류는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우주를 바라보고 있다. 지구를 고쳐쓰기에 이미 늦은 것일까? 일단 내 주변의 고장난 물건을 고쳐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고치는 게 습관이 되고 자신감이 생기면, 우리는 고장난 지구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북디자이너·영남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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