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의 영화의 심장소리] '비커밍 아스트리드'(크리스텐센 감독·2018), 말괄량이 아스트리드가 작가 린드그렌이 되기까지

  • 김은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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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1-05   |  발행일 2021-11-05 제39면   |  수정 2021-11-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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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의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아흔 살에도 매일 글을 썼다고 한다. 할머니가 된 린드그렌이 타자기 앞에 앉아 글을 쓰는 모습의 사진이 있다. 얼핏 여려 보이는 얼굴 어디에 그런 강인함이 숨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비커밍 아스트리드'를 보고 난 후의 느낌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동화 작가 가운데 한 사람, 스웨덴이 자랑하는 작가이며 존경받는 인물인 그녀는 젊은 날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영화는 작가가 되기 이전 가장 힘든 시절의 아스트리드를 그렸다.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말괄량이 아스트리드는 10대에 미혼모가 된다. 보수적인 고향을 떠나 스톡홀름에 온 그녀는 혹독한 시기를 보낸다. 하지만 어떤 어려움에도 끝까지 아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크리스텐센 감독은 아이를 향한 사랑으로 시련을 이겨내는 아스트리드의 모성애를 세심하게 그려낸다. 배우들의 진정성 있는 연기가 영화의 깊이를 더하는데 스웨덴 영화협회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및 남녀 조연상을 받았다. 인생의 중·후반엔 존경받는 작가로 사는 린드그렌이지만 젊은 날 아스트리드의 아픈 사연은 보는 이의 마음을 졸이게 한다. 영화의 배경은 1920~30년대, 엄격하기 그지없는 스웨덴의 생활상을 보는 것도 이채롭다.

영화는 80세가 된 아스트리드의 생일을 축하하는 아이들의 편지로 시작한다. "아이들의 마음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카세트테이프에 담긴 아이들의 목소리는 영화 중간중간에 흘러나온다. 왕립 도서관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기록물 보관소에는 7만5천여 점의 편지가 있다고 한다. 그녀의 기록물들은 모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단순한 작가를 넘어서 '클로카 굼마', 즉 마음속에 묻어둔 상처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영적 조언자·치유자로 불렸던 그녀다. 어둠과 좌절의 시기를 통과한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역할이다. "만약 외롭고 슬픈 어린이를(우울한 어린 시절을) 한 번이라도 밝게 만들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수많은 감사 편지를 받은 그녀의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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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시인·심리상담사

영화는 어린 아들과 고향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끝난다. 린드그렌과 결혼하고 작가가 되는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대표작 '삐삐 롱스타킹'의 첫 출간은 1945년 전쟁이 막 끝난 후였다. 힘든 시기에 더 밝고 씩씩한 이야기가 필요했는지 사람들은 아이들만의 세상에서 유쾌하게 살아가는 이야기에 열광했다. 폐렴에 걸린 딸에게 들려준 이야기로 시작된 '삐삐 롱스타킹'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영화나 TV 시리즈로도 사랑받았다. 백 편이 넘는 책을 쓴 작가일 뿐 아니라 아동인권과 동물복지, 녹지보호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던 그녀는 아흔 살에 '올해의 스웨덴인'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나는 내 안에 존재하는 아이를 위해 글을 쓴다"고 했던 작가. 인생의 전반전이 힘겨웠던 만큼 후반전이 더욱 빛나고 아름답다. 영화의 엔딩에 흐르는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마음을 울린다. "뛰어올라. 용감하게 뛰어올라. 절망에서 삶으로 어둠을 지나 빛으로." 역시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 밝은 법이다.
김은경 시인·심리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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