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향 영양 .12] 시인 조지훈…수필 '지조론'으로 친일파 정치인·변절 일삼는 지도자 질책

  • 류혜숙 작가
  • |
  • 입력 2021-11-30   |  발행일 2021-11-30 제12면   |  수정 2021-11-30 07:40

2021112901000815000032211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 지훈시공원에는 '승무' '낙화' '다부원에서' 등 27개의 시비와 청동조각상들이 어우러져 있고 그 가운데 시인의 동상이 서 있다. 영양에서 태어난 조지훈은 서정시를 대표하는 청록파 시인으로, 맑은 지조와 곧은 절개로 일생을 살아 '마지막 선비'라 불리기도 했다.
2021112901000815000032212
조지훈이 태어난 호은종택은 주실마을 중심부의 맨 앞에 자리한다.시인은 사랑마루와 연접한 사랑방에서 태어났다.
2021112901000815000032213
영양 주실마을에 있는 월록서당. 조지훈은 어린시절 일제 하의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 월록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조선어, 수신, 역사, 도서 등을 공부했다 .

여인은 '차운 샘물에 잠겨 있는 은가락지를 건져내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깬 여인은 부드럽게 배를 어루만졌다. 뱃속의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출산이 가까워지자 집안에서는 여인을 종택으로 불러 내렸다. 영양 일월의 주곡리, 주실(注室)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붓을 닮은 문필봉이 솟았고 뒤에는 물 위의 연꽃 같은 부용봉(芙蓉峯)이 펼쳐져 있으며 그사이를 넉넉하고 편안하게 장군천이 흐른다. 이곳에서 일제강점기인 1920년 12월3일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는 맑은 지조와 곧은 절개로 일생을 살았던 시인 조지훈이다.

#1. 조지훈의 어린 시절

주실마을은 한양조씨(漢陽趙氏) 세거지다. 인조 때인 1630년경 호은(壺隱) 조전(趙佺)이 처음 들어와 정착했다. 조전의 후손들은 실학자들과 교류해 일찍 개화했고, 일제강점기에는 모두가 똘똘 뭉쳐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조지훈이 태어난 종택은 마을 중심부의 맨 앞에 자리한다. 조전의 둘째아들인 조정형(趙廷珩)이 지어 아버지의 호를 따 호은종택이라 했다. 솟을대문이 덩실하다. 종택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7칸인 'ㅁ'자형으로 대문에 들어서면 사랑채 마루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조지훈은 사랑마루와 연접한 사랑방에서 태어났다. 종택에서 가장 좋은 방이라 한다.

조지훈의 아버지는 제헌(制憲) 및 2대 국회의원이자 한의학자인 해산(海山) 조헌영(趙憲泳)이며 어머니는 전주류씨(全州柳氏) 류노미(柳魯尾)다. 지훈은 그의 아호이고 본명은 동탁(東卓)이다. 할아버지 조인석(趙寅錫)이 '동방의 뛰어난 인재가 되라'는 뜻으로 동탁이라 지어주었다고 한다. 사헌부 대간이었던 조인석은 국권이 피탈되자 낙향해 마을의 월록서당(月麓書堂)에 신학문을 가르치는 영진의숙(英進義塾)을 세우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지훈은 일제 하의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 할아버지로부터 한학과 조선어, 역사 등을 배웠다.


어린시절 형과 함께 시인의 꿈 키워
11세때 '꽃탑회' 만들어 '꽃탑' 펴내
아버지 친구이자 시인 오일도 만나
서울 인사동 일월서방서 지내며 활동
'시원'의 동인으로 문예지에 詩 응모
'승무' '봉황수' 로 시인의 길 들어서


생가 뒤편에 조지훈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본가가 있다. 대문에 '방우산장(放牛山莊)'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그가 자신의 집에다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 조지훈은 '땅 위에 남겨 놓고 간 영혼의 새가 깃들이는 곳, 그 무성한 숲의 어느 한 가지가 방우산장'이라고 했다. 이 집에서 그는 제임스 매튜 배리의 '피터 팬',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 등과 같은 동화를 읽었고 9세 무렵부터 글을 썼다.

그는 시인이 되고자했던 형 세림(世林)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형을 통해 그는 자연스럽게 시를 접했고 함께 시인의 꿈을 키웠다. 11세 때에는 세림과 함께 마을 소년들의 모임인 '꽃탑회'를 조직해 동인지 '꽃탑'을 펴내기도 했다.

조지훈은 아주 어릴 때부터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열 살도 채 안된 지훈이 외가에 다니러 갈 적에도 일경이 따라붙었다. 그것은 아버지 조헌영이 일제의 요시찰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경북 상주 출신의 박열 의사가 일왕 암살 기도사건으로 체포돼 재판을 받을 당시 박열이 입은 조선의 관복을 제공한 이가 바로 조헌영이었다. 이후 조헌영은 그 관복을 소중히 보관했는데, 사연을 알고 있던 지훈은 자주 그 옷이 든 함을 열어보곤 했다고 한다. 훗날 조지훈은 '나의 시작(詩作) 노트'라는 수필에서 "박열이 입었던 관복을 집에서 어린 시절 직접 본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2. 시인의 길에 들다

1937년 17세가 된 조지훈은 형 세림과 함께 상경했다. 형제는 아버지가 1936년 인사동에 설립한 동양의약사(東洋醫藥社) 겸 일월서방(日月書房)에서 지내며 아버지의 친구이자 시인인 오일도를 만나 시인의 길로 인도받았다. 조지훈이 당시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한 일송 김동삼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용운을 찾아간 것도 이때였다. 한용운이 김동삼의 유해를 한강에 뿌리며 서럽게 울 때, 홍안의 젊은 문학청년 조지훈은 그 옆에 나란히 서서 또 그렇게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를 추모하며 이렇게 노래했다.

'아, 철창의 피눈물 몇 세월이던가/ 그 단심 영원히 강산에 피네/ 심상한 들사람들도 옷깃 여미고 우러르리라/ 온 겨레 스승이셨다. 일송 선생 그 이름아.'

그리고 그해에 형 세림이 세상을 떠났다. '꽃탑회'를 불온단체로 규정한 일경의 취조를 받고 나온 후 악화된 치통에도 울화를 참지 못하고 술을 마시다 세상을 떠났다. 21세였다. 조지훈은 형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으로 괴로워했다. 그는 충격을 이겨내기 위해 원산에서 평양까지 걸어서 여행했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시인 오일도와 함께 형의 유고시집인 '세림시집(世林詩集)'을 펴내 그 넋을 위로했다.

조지훈은 형을 위해 더욱 습작에 열중했다. 신극에도 관심을 둬 극예술연구회와 중앙무대, 낭만좌 등의 극단에 드나들었다. 독학으로 전문학교 입학자격을 취득해 1939년 혜화전문학교(동국대)에 입학했으며 오일도가 창간한 '시원'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이해 봄 순수문예지 '문장(文章)'의 신인 모집에 시 '고풍의상(古風衣裳)'을 응모했는데, 시인 정지용(鄭芝溶)으로부터 호평을 받아 초회 추천됐다.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처마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정지용은 "시에서 깃과 쭉지를 고를 줄 아는 것도 천성의 기품이 아닐 수 없으시니"라며 조지훈의 활동에 기대감을 표했다. 이어 12월에 '승무(僧舞)', 1940년에 '봉황수(鳳凰愁)'를 발표함으로써 추천이 완료됐다. 드디어 시인의 길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2021112901000815000032214
조지훈의 삶과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지훈문학관'. 소년 시절 즐겨 읽었던 책을 비롯해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시대를 고민한 작품까지 시인의 전 생애가 한 편의 전기처럼 펼쳐진다.

#3. 마지막 선비

호은종택과 월록서당 사이에 '지훈문학관(芝薰文學館)'이 있다. 정면 열두 칸의 긴 한옥 건물로 2007년 5월 개관했다. 현판은 부인 김난희 여사가 쓴 것이라 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그의 일생이 펼쳐진다. 책 읽던 소년 시절, 20대 청록 시절, 그리고 광복과 전쟁이 이어진다.

일제 말기 그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신문을 받고 풀려난 뒤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에 은거하기도 했다. 일제가 싱가포르 함락을 축하하는 행렬을 주지에게 강요한다는 말을 듣고 종일 통음하다 피를 토한 적도 있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동안 친일 문학과 사상 전환의 강요에 한 번도 몸을 굽힌 적 없다. 그리고 광복이 되자 그는 우리 손으로 된 최초의 국어교과서와 국사교과서를 편찬했다. 그는 1948년부터 세상을 뜨기 전까지 고려대 교수로 재직했고 6·25전쟁 동안 종군작가로 활동했다.

커다란 벽 앞에서 '지조론'을 마주한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요, 냉철한 확집이기도 하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 없다.'

'변절자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글은 1960년 '새벽' 3월호에 실린 조지훈의 대표적인 수필이다. 1950년 말 과거의 친일파들은 뉘우침없이 정치 일선에 나왔고, 지도자들은 상황에 따라 변절을 일삼았다. '지조론'에 나타나는 매서운 질책은 민족을 위한 양심의 절규였다.


광복 후 최초의 국어·국사교과서 편찬
곧고 반듯한 성품 정치비평 많이 남겨
불의·부정맞서 지식인으로 책임 다해
'마지막 선비' '지사문인'으로도 불려
'지훈 문학관' 산책로에 시공원 조성


5·16 이후 그는 '혁명정부에 직언하다' 등의 논설을 쓰는 한편 한일협정 비준을 반대한 서명 운동을 주동해 정치교수에 몰리기도 했다. 그는 항상 사직서를 지니고 다녔다. 그는 시대의 지성으로서 추상(秋霜)같은 정치 비평을 많이 남겼으며 어느 정권 하에서도 불의와 부정에 맞서 싸웠다.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시대적 양심이었다. 이러한 그를 세상은 '마지막 선비' 또는 '지사문인(志士文人)'이라 불렀다.

조지훈은 늘 곧고 반듯했지만 해학도 뛰어났다. 산만한 듯하면서도 조리있고, 우스갯소리 같으면서도 품위 있는 그의 유머는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생전에 그는 한 학생과 파자(破字)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달밤에 개가 징검다리를 건너는 글자는?"

"그럴 연(然)자입니다."

"나무 위에서 또 또 또 나팔을 부는 글자는?"

"뽕나무 상(桑)자입니다."

"그럼, 사람이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글자는?"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자네도 참, 그렇게 쉬운 글자도 모르다니. 그건 말이야, 한글 '스'자라네."

문학관 뒤 산자락을 타고 산책로가 이어진다. 길섶에는 시비들이 늘어서 있다. 산책로는 부용봉의 가운데 봉우리의 기슭에 닿는다. 그곳에 지훈시공원이 있다. '승무' '낙화' '다부원에서' 등 27개의 시비와 청동조각상들이 어우러져 있고 그 가운데 시인의 동상이 서 있다. 그는 1968년 5월17일 고혈압으로 토혈한 후 입원했으며 기관지 확장증으로 19일 세상을 떠났다. 48세였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디지털영양군지. 지훈문학관 누리집.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