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경상감영과 대구읍성..."대구읍성 신축 위해 전국의 축성기술자 전부 동원 5개월만에 쌓아"

  •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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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1-14   |  발행일 2022-01-14 제35면   |  수정 2022-01-14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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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읍성 둘레는 2.7㎞로 위치는 지금의 동·서·남·북성로와 일치한다. 성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만든 도로이기 때문이다. 1870년 고종 때 외세 침략을 대비한다고 관찰사 김세호가 크게 증축했다. 4대문을 정비하고 망루를 세웠으며 여첩(女堞·성 위에 쌓은 담)을 만들었다. 남문을 영남제일관, 문루를 낙서루라 했다.〈대구시 제공·영남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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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망우공원에 복원된 영남제일관. 〈대구시 제공·영남일보 DB〉

경상도는 고려 현종 때 전국을 5도 양계로 개편하면서 처음 만들어졌다. 900년 세월동안 크게 변동되지 않고 이어져 왔다. 감영은 고려시대에 경주에 있다가 세종대왕 때 상주로 옮겨 임진왜란 전까지 있었다. 임란 때 칠곡·달성·안동으로 옮겨 다니다가 임란 후 1601년 대구에 자리 잡았고, 토성이었던 대구읍성은 영조 때 무신난을 겪고 난 뒤 1735년 석성으로 쌓았다. 1870년 고종 때 외세침략에 대비한다고 크게 증축했고 구한말에 친일 관리에 의해 허물어졌다.

◆경상감영, 순영과 유영

경상도 으뜸 벼슬인 도백은 조정에서 임명했고 고려시대에는 안찰사·안렴사, 조선시대에는 관찰사 또는 감사로 불렀다. 임기는 1년, 조선후기에 2년으로 늘었고 경상도 900년사에서 영백(嶺伯, 경상감사 별칭)을 맡은 이가 900명 조금 넘으니 평균 보임기간이 1년이다.

초기에는 '행영(行營)' 또는 '순영(巡營)'이라 하여 관할 지역을 순력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관찰사의 업무 인수인계도 도의 경계에서 이루어졌다. 그 유적이 문경 조령관문의 교귀정이다. 여기에서 신임과 이임 감사가 임무 교대를 했다. 그 시절에는 감사가 머무는 곳이 곧 감영이니 중종 때 경상감사 한세환이 해인사에 잠시 머물며 법당에서 공무를 보았다는 기록도 있다.

임란 후 대구감영부터 감영에서 업무를 보는 유영(留營)체제로 바뀌었다. 경상감영을 대구로 옮기는 데 큰 역할을 한 이는 한음 이덕형이다. 한음은 임란 후 대구에 두 번 왔다. 1599년 좌의정 때 내려와 전란 참화에 통탄했고 1601년 삼남 체찰사로 10개월 동안 남도에 머물면서 전후 복구를 진두지휘했다. 무너진 읍성을 복원하고 폐허가 된 동남 해안진지와 끊어진 역참을 정비했다. 임란 중 명재상이 류성룡이라면 전후 복구의 명재상은 이덕형이다.

한음은 영남 중심지로 교통이 편리한 대구에 경상좌·우도를 합쳐 감영을 만들고 경주부윤을 지낸 이시발을 경상감사로 주청했다. 이시발은 3년간 재직하면서 전후 복구와 대구감영의 기초를 다졌다. 대구감영이 설치된 시기는 정구의 제자로 공산의병장인 손처눌의 모암일기에 1601년 5월이라고 당시 상황이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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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감영 관찰사의 처소로 사용됐던 징청각.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07년 관찰사 겸 부사인 윤광안에 의해 중건됐다.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됐다. 〈영남일보 DB〉

◆감영관아, 선화당과 징청각

감사가 있다고 감영, 병마절도사는 병영, 수군절도사는 수영, 삼도 수군통제사가 있는 곳이 통영이다. 대구부에 감영이 들어오면서 대구부는 서편에, 경상감영은 동편에 자리 잡았다. 객사는 대구부 시절부터 있었고 감영 건물은 20여개로 선화당, 징청각, 관풍루가 남아있고 선화당은 보물 문화재가 됐다.

선화당은 팔도감영 정청(政廳)의 공통된 명칭으로 원주·공주에도 있고 전주선화당은 최근에 복원했으며 함흥선화당은 북한의 국보다. 징청각은 제2정청인데 안내문에 왜 처소나 관사로 돼 있는지 모르겠다. 영조 때 징청각에 불이 나 교서(敎書)와 유서(諭書)가 타 버려 대죄한다는 경상감사 장계가 있고, 동학혁명 때 전주성이 동학농민군에 접수돼 전봉준은 선화당에, 전라감사는 징청각에 머물렀으며, 해주징청각은 불이 나 재건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다른 감영에도 있었고 현재 대구 징청각만 유일하게 남아있다.

'선화'는 임금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교화한다는 승류선화(承流宣化)에서, '징청'은 고삐를 잡아 천하의 정치를 맑게 한다는 '남비징청' 고사에서 나왔으니 모두 목민관의 책무다. 감영 삼문은 포정문인데 명나라 지방관아 포정사에서 유래됐다.


한음 이덕형, 대구로 경상감영 이전
죄인 치죄 선화당·감사 집무 징청각
20여개 감영 건물…관풍루 등 남아
일제시대 관아 차지해 침탈 기지화

외침보다 내치 목적 쌓은 '대구읍성'
고종때 외세침략 대비해 크게 증축
4대문 정비·城 위에 쌓은 담 만들어
해체된 성돌, 인근 신축건물에 사용



경상감영 관아 배치는 1888년 자인현감 오홍묵이 쓴 자인총쇄록에 자세히 나와 있다. 종로초등 자리에 있던 객사는 가운데 달성관·동익헌에 팔달헌 현판이 걸려있고 객사 아래쪽에는 판관이 머무는 주을헌이 있다. 관찰사는 33칸 징청각에 머물고 있었으며 징청각 서쪽에 내아(관사)가 있고 정청인 선화당은 28칸으로 내청 편액이 약임당(藥臨堂)이다. 내삼문은 영남포정아문이고 외삼문 편액은 관풍루·영남포정사·영중제곤(감영 문지방)이다. 신남영에는 오백여 병정이 있고 이 밖에 영리청 등 이십여 관아건물에 대한 기록이 있어 감영 복원에 귀중한 자료다.

선화당은 송사나 죄인을 치죄하는 곳으로 감영의 본관이고 징청각은 감사 집무실이다. 1807년 순조 때 대화재로 새로 지으면서 선화당의 크기는 줄이고 징청각은 늘렸다. 징청각에는 온돌이 있고 선화당에는 없었으며 선화당·징청각·내아는 회랑으로 연결돼 있다. 선비문집에 교남징청각에서 술 한 잔하고 글 빨리 쓰기(走筆), 영영(嶺營)징청각에서 기생 춤 구경하고 방백에게 글을 올리다 라는 시구가 있으니 징청각에서 여흥을 벌인 듯하다.

1888년 늦가을에 프랑스 민속학자 샤를 바라가 서울에서 부산으로 여행하면서 서양인으로 처음 경상감영에 들러 김명진 관찰사의 환대를 받고 읍성 위에서 바라본 대구의 모습을 그의 저서 '조선기행'에 남겼다. "다닥다닥 붙은 초가지붕, 용마루에서 내려오는 기와지붕의 직선과 곡선의 기막힌 조화에 감탄했고 특히 눈에 띄는 교동 향교와 감영 건물의 우아한 모습, 관아 지붕 꼭대기에는 관찰사의 붉은 깃발이 도시 전체를 굽어보며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고 했다. 그는 파리로 돌아간 뒤 관찰사 환대에 감사의 뜻으로 양탄자 두 장을 외교관을 통해 선물 보냈고 관찰사는 답례로 감사편지와 대나무발 넉 장을 보내왔다고 여행기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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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근대역사관이 소장하고 있는 1905년경 경상감영 선화당 사진. 〈대구시 제공〉

◆침탈 기지가 된 경상감영

일제의 조선 침탈과정에서 대구는 다른 도시와 판이했다. 대구는 경상감영을 통째로 일제에 내어 준 특이한 사례다. 부산과 인천 같은 항구도시는 물론 내륙 도시에도 일본인 주거지가 별도로 만들어지고 신시가지가 되면서 그곳으로 새 관공서를 짓거나 옮겨지는 형태인데 대구는 일본인이 읍성의 중심지역을 점거하고 감영 관아를 차지해 침탈 기지화했다.

1907년 3월 관찰사서리 백낙준이 참정대신 박제순에게 보고한 경상관아 건물 사용현황에 따르면, 징청각은 일본이사청이, 연초당과 소이재는 경시·경부 숙소, 내아는 일본수비대 식량창고, 백화당은 재정고문 지부, 사일당·회계소·별고·외통방은 일본순사 숙소, 서기청은 순검교섭소, 도훈도청은 경무관 숙소로 사용하고 있어 20여 감영 건물 대부분을 일본인이 점거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선화당은 우리 관리가 쓰고 있었고 취고수청(악사 관리)만 광문사에서 빌려 쓰고 있었다. 광문사는 1907년 2월 서상돈·김광제가 국채보상운동을 처음 발의한 단체다. 선화당은 온돌이 없어 추위에 떨고 있었고 관찰사서리와 주사는 숙소가 없어 퇴근 후에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으니 서기청을 관찰사 숙소로 쓸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공문서에 애걸하고 있다. 이는 친일관리 박중양이 1906년 10월 대구읍성을 허물고 일본인에게 모든 것을 내준 결과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로 칭할 만큼 골수 친일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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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성학교 건물 석재로 사용된 대구읍성 돌.

◆무신난 여파로 쌓은 대구읍성

1728년 영조 4년에 이인좌 난이 일어나자 영남을 달래기 위해 관찰사로 내려온 조현명은 천하의 일은 알기가 어려우니 미리 대비해야 한다고 석성 신축을 영조에게 건의했고 이후 경상감사 보임을 4명이나 연이어 기피하는 인사 참사가 일어나 화가 난 영조는 이조판서 김재로를 경상감사로 좌천시켰고 5개월간 관찰사를 지낸 김재로는 후임 민응수와 대구읍성 신축을 논의한 듯하다.

민응수는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가 당고모였고 노론 영수인 민진원이 당숙, 아버지 민진주는 이조판서를 지낸 노론의 실세였다. 대구읍성은 실세 관찰사 민응수의 작품이다. 게다가 영의정을 4번이나 한 영조 총신 김재로가 좌의정에 있으면서 석성 신축을 적극 지원했다.

대구읍성 신축은 전국의 축성 기술자가 전부 동원됐다. 함경도에서 변방 성을 쌓던 이들도 내려왔다. 1735년 입춘이 지난 양력 2월 중순부터 장마 오기 전 7월 중순까지 5개월 만에 속전속결로 쌓았다. 조정 행정력이 총동원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조에게는 축성을 시작한 뒤 사후 보고로 김재로가 아뢰었고 처음부터 외침 대비가 아니라 내치, 즉 백성을 다스리는 목적이었음으로 실록에서 밝히고 있다.

◆아름다운 대구읍성

대구읍성은 둘레가 2.7㎞로 위치는 지금의 동·서·남·북성로와 일치한다. 성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만든 도로이기 때문이다. 1870년 고종 때 외세 침략을 대비한다고 관찰사 김세호가 크게 증축했다. 4대문을 정비하고 누를 세웠으며 여첩(女堞·성 위에 쌓은 담)을 만들었다. 남문을 영남제일관, 문루를 낙서루라 했고 1980년 망우당 공원에 복원해 놓았다.

박중양에 의해 읍성이 강제로 철거되면서 사진이나 그림 한 장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앞서 언급한 샤를 바라가 쓴 조선기행에도 나온다. "성벽 위에서 조망하며 성벽 위 순시로를 돌았는데 그 길은 북경성의 축소판 같았다. 평행사변형의 성벽이 도시 전체를 둘러싸고 이어져 있었고 요새화한 성문은 위용을 떨치고 그 위에는 우아한 누각이 세워져 있었다. 누각 내부에는 역사를 환기하는 글과 그림으로 장식돼 있었고 거기에서 나는 황금빛 가을 들판과 구불구불 흘러가는 금호강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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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대구읍성의 높이는 대략 5.5m로 최근에 복원한 청도읍성(4m)보다 높아 위용이 대단한 듯하고 성벽 두께는 8m로 지금의 2차선 도로(7m)보다 넓다. 허물지 않았더라면 중국 서안성처럼 성벽 위를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는 풍경이 됐을 것이다. 해체된 성돌은 근처 계성학교와 서양식 건물 신축에 사용됐고 지금은 읍성 흔적마저 찾기 어렵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여러 관계자의 도움으로 샘플 같은 읍성 미니어처와 감영 배치도, 그리고 복원된 읍성의 정문격인 영남제일관이 동촌 만우공원에 지어지기도 한다. 최근 재개발 현장 등에서 성돌이 무더기로 발견되고 있어 대구읍성 복원을 향한 희망의 불이 점점 밝아오는 것 같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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