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의 연필의 무게 걸음의 무게] 찰리 채플린…"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20세기 천재 희극인

  • 박미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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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6-03   |  발행일 2022-06-03 제38면   |  수정 2022-06-03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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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열 어머니 아래 불우했던 유년기
아버지에 의해 9세때 아동극단 입단
16세 웨스트 엔드서 촉망받는 배우로
히틀러 풍자 '위대한 독재자' 등 히트
1차 세계대전 중에도 제작 영화 흥행
용공주의자·반미주의자로 몰리기도


19세기 말 런던. 항상 침대 머리맡에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두고 읽던 소년이 있었다. 빈곤과 슬픔이 가득한 처지의 올리버보다 그다지 나을 것도 없는 '뮤직홀의 아이'로 불리던 찰리 채플린이었다. 부모는 템스 강 남부의 빈민가에서 만난, 거의 무명인 가수와 배우였다. 더군다나 무대에서 공연을 마친 배우가 손님들과 술을 마시게 해 매상을 올렸던 당시의 관행으로, 아버지는 심한 알코올 중독이었고 어머니는 혼외자를 낳아 처절한 불화 끝에 이혼을 했다.

양육비를 주지 않는 재혼한 아버지와 삯바느질로 겨우 생계를 잇던 어머니의 정신분열증으로 헐벗고 굶주린 여섯 살 찰리와 열 살인 형 시드니(이부형제)는 보육원에서 자랐다. 다행히 그곳 환경은 그리 열악하진 않았으나 어머니의 병세 호전 여부에 따라 몇 번이나 어머니의 집, 아버지의 집 그리고 보육원을 번갈아 오가며 보냈다. 예민한 성격의 소년이 정서 불안과 애정 결핍을 겪은 것은 당연했다.

1898년 열 번째 생일을 5개월 앞둔 소년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가 그를 아동극단 '랭커셔의 여덟 꼬마들'에 입단시켰다. 그해 말 맨체스터 왕립극장에서 '어리숙한 이들'이란 극으로 데뷔를 한 소년은 이후 2년간 극단을 따라 영국 순회공연을 다녔다. 소년의 재능은 아버지의 무대 기질에 평소 아이들과 함께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의 행동거지를 보며 그들의 상태를 짐작하던 어머니의 날카로운 관찰력, 그리고 뮤직홀에서 태어나고 자란 독특한 환경에 기인한 것이었다.

1901년 정신병원에서 다시 퇴원한 어머니가 배우 생활은 아들에게 아무것도 가져다 줄 수 없다고 판단해 아동극단에서 탈퇴시켰다. 이후 열두 살 소년 채플린은 어머니와의 생계를 위해 이발사 조수, 잡화상과 병원의 심부름꾼, 호텔 보이, 제지공장·유리공장·인쇄소 직공을 전전하게 된다. 1903년 옷가지를 시장에서 팔기도 하고 행상들의 장난감 제조를 돕던 중 다시 어머니가 입원을 하게 된다. 외톨이가 된 소년을 연극배우로 이끈 것은 정기여객선 급사로 근무하던 형 시드니였다.

연극 '셜록 홈즈'의 빌리 역으로 2년 만에 웨스트 엔드에서 촉망받는 16세 배우가 된 채플린은 '집안 수리'의 실수투성이 배관공으로 당대 최고의 촌극 흥행주였던 프레드 카노의 무성희극 배우단과 계약을 맺고 승승장구하게 된다. 특히 카노는 거칠고 무례했지만, 희극을 비극적 분위기와 감성적 터치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이어서 그 철칙을 채플린에게 전수했다.

카노의 순회공연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고, 그때 미국의 키스턴영화사 맥 세넷의 눈에 띄어 채플린은 1913년 미국으로 간다. 당시 맥 세넷이 제시한 파격적인 봉급 액수에 끌렸다고는 하지만, 평생 상처로 남은 첫사랑 헤티 켈리와의 결별이 큰 몫을 차지했다. 하지만 주당 두 편씩 찍어대던 스튜디오에서의 즉흥적 연출, 숨가쁜 촬영에 그의 섬세한 연기나 예술이 자리 잡을 데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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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 시인

◆떠돌이 기믹, 찰리 채플린의 탄생

1914년 첫 영화 '생활비 벌기' 촬영을 마친 그는 독창적인 새로운 인물의 창조를 절감했다. 의상 창고에 들어가 한 시간 있다가 문을 열고 나타난 그를 보고 맥 세넷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모두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헐렁한 바지에 꽉 끼는 상의, 조그만 모자에 커다란 구두, 칫솔모같은 콧수염에 대나무 지팡이를 든 그는 '떠돌이 기믹(gimmick·대중의 눈을 피하기 위한 상술)', 아니 인류의 뇌리에 영원히 각인될 그 모습이었던 것이다. 찰리 채플린의 탄생이었다.

대중들은 열광했다. 더군다나 뮤직홀을 비롯해 영국에서의 연극 활동으로 인한 채플린의 연출 재능과 영상화법은 당시 무성영화 감독 그 누구보다 탁월한 것이어서 1914년 6월부터 그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틸리의 무너진 사랑'을 제외하고 그가 출연한 모든 영화를 직접 감독하게 되었다. 예사네이영화사로 옮겨 '챔피언' '떠돌이' '은행' '작업' 등을 만들고 흥행에도 대성공을 거두지만, 그의 작업방식을 이해하지 못한 영화사와의 소송으로 씁쓸하게 막을 내린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그는 자신만의 자율성을 담보해 줄 스튜디오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뮤추얼영화사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전당포' '모험가' 등을 만들었다. 1차 세계대전 중이었지만 그의 영화들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퍼스트 내셔널 픽처스에서 만든 사회 풍자극 '개의 생활' '어깨 총' 등도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집 없는 아이'를 촬영하면서 만난 재키 쿠건을 발견한 그는 영화명을 '키드'로 바꾸고 공전의 큰 히트를 기록한다.

1919년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를 설립하고, 1926년부터 시작된 유성영화의 인기를 무시하고 무성영화 '황금광 시대' '시티 라이트'를 찍어 대성공을 거둔다. 그때 피카소, 아인슈타인, 간디, 처칠 등 여러 부류의 인사들과 교류하며 수개월 동안 여행을 한다. 1936년의 '모던 타임스'는 영화 첫 장면이 르네 클레르의 공장 장면을 도용했다며 나치의 선전 담당 괴벨스의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1939년 그와 묘하게 닮은 히틀러를 풍자한 영화 '위대한 독재자' 제작은 많은 협박과 정치문제가 있었지만, 1940년 개봉되자마자 흥행 신기록을 세웠다. 1942년에는 독일 나치에 대항해 제2전선 결성을 촉구하는 운동 전개와 소련 전쟁을 지원하자는 연설로 용공주의자로 몰렸고, 1947년 '살인광 시대'를 발표했을 때는 반미주의자로까지 몰리게 된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이 말은 영화의 클로즈업과 롱숏 기법을 뜻하는 것이지만, 그는 이 말을 자주 차용하여 인생을 통칭하는 명언으로 만들었다. 그의 삶 자체는 사실 이 말과 더없이 맞아떨어지는데, 첫 번째 부인 밀드레드 헤이스를 시작으로 리타 그레이, 폴렛 고더드, 우나 오닐로 이어지는 일련의 평탄지 못한 결혼과 공산주의자 혐의로 1952년 매카시즘 광풍을 등에 업은 에드거 후버의 FBI에 의해 미국 입국 금지로 말년을 스위스에서 보내게 된 것이 그것이다.

1914년부터 시작된 그의 미국생활은 성공 그 자체였다. 서밋 드라이브에 '캘리포니아풍 고딕양식' 저택을 지어 불쌍한 어머니를 모셔왔고, 의붓형 시드니와 의붓동생 휠러의 인생까지 살뜰하게 챙겼다. 세 번의 결혼 실패 끝에 노벨상을 받은 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 우나 오닐(영화 닥터 지바고의 부인 토냐 역을 연기한 배우)과의 슬하에 8남매를 두며 백년해로도 했다. 전처들과의 사이 자녀들도 모두 잘 양육했다.

1952년 영화 '라임 라이트' 홍보를 위해 우나와 자녀들을 데리고 영국으로 출국한 날, 에드거 후버는 그의 미국 입국 금지를 발표했고 그는 더 이상 미국에 살지도, 일하지도 않기로 했다. 영국을 비롯한 거의 모든 유럽국가가 미국을 비난했다. 1953년 스위스 코시르에쉬르베베이에 아름다운 저택을 마련해 가족들과 말년까지 그곳에서 보냈고, 1977년 12월25일 그곳에서 숨졌다.

자신에게 집시의 피가 흐르는 것이 자랑스러웠던 소년, 독학으로 바이올린·첼로·피아노를 연주하고 작곡도 하며 글을 쓰는 재능까지 탁월해 자서전까지 직접 썼던, 정말 영화에서나 이룰 수 있는 이야기를 현실로 보여준 영화인 채플린은 가족들과 행복한 말년을 보내며 영국 여왕에게 기사 칭호를 받은 귀족으로, 세계 영화인들의 찬사를 받으며 행복하게 코시르에쉬르베베이에서 살았다. 부인 우나와 함께 그곳에 묻혀 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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