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구로에서] 오래 묵혀두었던 다큐 한편을 보며

  • 백승운
  • |
  • 입력 2022-06-15   |  발행일 2022-06-15 제26면   |  수정 2022-06-15 07:05
황혼기에 당찬 도전 하며
오지게 재밌게 나이 드는
일곱명의 할머니들 보며
새로운 도전과 열정은
나이와 무관함을 되새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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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가시나들'. 제목부터 튄다. 2019년 개봉한 다큐멘터리다. 성인문해교육을 받고 한글을 배워 시집까지 낸 경북 칠곡군의 일곱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개봉 당시 보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최근에서야 생각이 나 볼 수 있었다.

'칠곡 가시나들'은 일곱 할머니들이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을 향해 가는 다큐다. 시청하는 내내 뒤늦게 한글을 깨치고 인생 사는 맛에 푹 빠진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유쾌하면서도 뭉클했다.

다큐 속의 할머니들은 해맑고 천진난만한 아이들 같았다. 장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일렬로 서서 거리의 간판을 한 자 한 자 읽는 모습엔 갓 한글을 배운 꼬마들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받아쓰기 시간 밥상 아래에 낱말카드를 숨겨두고 커닝하는 모습은 천생 개구쟁이 초등생이다. 진지한 모습으로 시를 한자 한자 읊을 때는 문청이 따로 없었다. 이들은 글을 깨치고 나니 '여기도 시 저기도 시, 시가 천지삐까리'라고 입을 모았다. '원 투 스리 포, 영어도 배우고 한번 해보자'며 당찬 의욕을 드러내기도 했다. 칠곡의 할머니들은 배움의 즐거움과 도전의 진정한 의미를 온 몸으로 설명해 주고 있었다.

아들에게 처음 편지를 쓰는 할머니의 모습이 나올 땐 울컥했다. 며칠을 걸려 꼭꼭 눌러 쓴 편지에는 '너 낳고 참 기뻤는데, 이제 내 몸이 아프니 미안하고 늘 고맙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편지를 들고 처음으로 우체국에 가는 모습과 행여 떨어질까 침을 두 번 세 번 바른 우표를 꾹꾹 눌러 붙이는 장면에서는 목이 멨다.

다큐를 본 후 할머니들이 낸 시집을 부러 찾아 읽었다.

'공부시간이라고/ 일도 놓고/ 헛둥지둥 왔는데/ 시를 쓰라 하네/ 시가 뭐고/ 나는 시금치씨/ 배추씨만 아는데.'(소화자 할머니의 '시가 뭐고?' 중에서)

'내친구 이름은 배말남 성주댁/ 얼구리 애뻐요/ 성주댁 이를 잘해요/ 친구가 있어 조아요.'(권영화 할머니의 '옆자리 친구' 중에서)

할머니들이 쓴 시는 거칠고 투박했다. 군데군데 맞춤법도 맞지 않았다. 시가 전하는 함축과 절제의 미학은 찾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시집을 읽는 내내 가슴 따뜻했다. 어느 저명한 시인의 작품보다 울림이 있었다. 때론 가슴을 짓누르고 때론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는 명작이었다.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다큐와 시집을 보며 할머니들의 지난한 삶과 그 속에 맺힌 한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글자를 아니까 사는 게 더 재밌다"는 한 할머니의 말처럼, 그들은 황혼기에 새로운 세상을 만난 듯했다. 무엇보다 새로운 도전과 미래를 그리며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한없이 존경스러웠다.

나이가 들면 무기력해질 때가 순간순간 찾아오기 마련이다. 열정은 고사하고 버티는 일조차 버거울 때가 많다. 새로운 도전은, 하고 싶지도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중년에 접어들면서 필자 역시 매 순간 그렇다. 다큐 속 할머니들의 당찬 모습을 보면서 다시 '도전'을 생각한다. 새로움과 열정은 나이듦과 무관하다는 것을 되새긴다. 혹시 열정이 사라지고 버티는 일조차 버겁다면 '칠곡 가시나들'을 한번 보시길….

백승운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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