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만진의 문학 향기] 향기와 냄새의 두 언덕

  • 정만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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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9-16   |  발행일 2022-09-16 제15면   |  수정 2022-09-16 07:34

[정만진의 문학 향기] 향기와 냄새의 두 언덕

나라가 독립을 되찾자 젊은 시인 세 사람이 공동시집 '청록집'을 펴냈다. 1998년 9월16일 '청록파' 시인으로 익히 알려진 박두진이 세상을 떠났다. 박두진은 1939년 정지용 추천으로 '묘지송'과 '향현'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묘지송'을 읽어본다.

"북망이래도 금잔디 기름진 데 동그란 무덤들 외롭지 않으이./ (중략) 향기로운 주검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나라가 망해 식민지가 된 지 어언 30년째, 한반도 전역이 무덤이나 다름없다. 살아 있을 때 이미 더없이 서러웠던 삶들인데 죽었다 한들 무에 그리 슬플 것인가! 언젠가 무덤 속까지 환하게 비춰줄 햇빛이 그리울 뿐.

드러내놓고 일본제국주의를 비판하면 발표가 불가능하니 이렇게 에둘러 표현할 수밖에 없다. '향현'은 어떤 내용일까? 향기로운 언덕이라니, 궁금하다.

"아랫도리 다박솔 깔린 산 넘어 큰 산 그 넘엇 산 안 보이어 내 마음 둥둥 구름을 타다./ 우뚝 솟은 산, 묵중히 엎드린 산, 골골이 장송 들어섰고, (중략) 산이여! 장차 너희 솟아난 봉우리에, 엎드린 마루에, 확확 치밀어 오를 화염을 내 기다려도 좋으랴? 핏내를 잊은 여우 이리 등속이 사슴 토끼와 더불어 싸릿 순, 칡 순을 찾아 함께 즐거이 뛰는 날을 믿고 길이 기다려도 좋으랴?"

박두진은 먼 산이 그립다. 산토끼, 사슴, 여우 등 무수한 짐승들이 함께 어우러져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그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그날이 언제인가?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지만 현명한 독자들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세 시인은 일제의 친일문학 창작 강요를 거부했다. 직접 독립운동에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붓을 꺾고 지조를 지켰다. 수많은 문인이 친일로 돌아섰던 데 견주면 청록파의 절필은 지식인다운 반듯한 모습의 실천이었다.

박두진은 5공 때도 품위를 지켰다. 전두환 측이 국회의원 자리를 제안했다. 박두진은 '특사'들이 찾아와도 만나지 않았다. 결국 아무개 시인이 그 자리를 꿰찼다. 아무개 시인은 국회의원을 지낸 후 또 다른 고위 공직도 역임했다. 하지만 그가 향기로운 언덕으로 여겼던 높은 관직에는 향기가 아니라 냄새만 짙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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