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의 트렌드 스토리] 마법의 물, 정화수…새벽에 길은 맑고 정결한 정화수…장독대 올려두고 가족평안 기원

  • 이재훈 영진전문대 호텔항공관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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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2-24 08:43  |  수정 2023-02-24 08:44  |  발행일 2023-02-24 제3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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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계묘년의 해가 떠오른 지도 어느덧 한 달 남짓 시간이 흘렀다. 그저 자연의 섭리에 따라 뜨고 지는 것을 반복할 뿐인 태양이지만, 우리 인간은 거기에 날짜를 부여하여 1월1일을 특별하게 생각하며,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될 수도 있고, 그러한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의미를 부여한다. 이처럼 사람의 삶 속에서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물' 또한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바로 동의보감에서도 등장한 '정화수'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정화수의 정의는 '이른 새벽에 길은 맑고 정결한 우물물'을 의미한다. '정안수' '정한수'로도 알려져 있지만 표준어는 '정화수'가 맞다. 단순히 샘이나 우물에서 제일 먼저 길어 올린 물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정화수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작은 바위 위 회색 사기대접 하나
어머니의 정화수
첫 새벽길은 맑고 정한 물
바위에 올려놓고 치성드린 정화수다
객지 나간 내 새끼
정화수같이 맑고 깨끗하게
무탈하라, 눈 감고
두 손 모아 치성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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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영진전문대 호텔항공관광과 교수

박재근의 '정화수'(2017)에서 볼 수 있듯이 흔히 시험을 앞두거나 간절한 일이 생기면 '물 떠놓고 기도한다'라는 표현을 한다. 이때 '물'이 바로 정화수인 것이다. 주부들이 정화수를 떠놓고 소망을 비는 장소는 우물가나 장독대, 부엌 등이 있는데 이곳들은 대표적인 여성의 공간이다. 따라서 신앙대상은 여성이 모시는 가신이 된다. 조왕에게 가족의 평안을 빌면서 정성을 들이거나 약을 달이는 데 쓰이는 신앙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비념이나 집안의 작은 고사에는 소반상에 차려진 정화수와 황토가 쓰인다.

원불교신문에 따르면 정화수는 세시풍속 속에서 정성을 들일 때 사용되는 공물이기도 하다. 경북 안동시 풍산읍에서는 음력 2월 초하루 영등일에 각 가정이 정화수를 올려 집안이 평안해지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풍속이 있다. 충남 서산 창리에서는 동제 때 국수당의 제단에 정화수 세 그릇을 바치고 제사를 지낸다.

여성 공간 우물·부엌서 모시는 가신
하늘의 정기가 몰려 있는 '정화수'
영혼 씻어 극락왕생 비는 '씻김굿'
치병력·천지 조화·사악함 쫓는 힘
물신앙 통해 간절한 소망·마음 투영

시인 황학주는 '정화수 한 그릇'(2022)이란 글에서 제주도 조천마을에 있는 용천코스라고도 불리는 제주올레 18코스를 소개하며 엉물빨래터와 용천수에 대해 '작고 고색이 서린 고향 집 장독대 위엔 아직도 당신이 올려둔 정화수 한 그릇이 자식들의 축복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라고 하였다.

신앙의 매개로 쓰이는 정화수는 기독교 신앙의 세례 또는 영세의 물과 같은 관념이 담겨 있다. 부정이 있다고 생각되는 대상을 향해 그릇의 정화수를 손가락 끝으로 세 번 흩뿌리는 것으로 정화의 주술이 베풀어진다. 이와 같은 모습은 우리가 소금을 이용하는 것과 비슷하다.

<동의보감>에는 한 사람의 건강과 수명에 물이 아주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질은 평(平)하고 맛은 달며[甘], 독은 없다. 입에서 냄새가 나는 것을 없애고 얼굴빛을 좋아지게 하며, 눈에 생긴 군살과 예막도 없애며, 술을 마신 뒤에 생긴 열리도 낫게 한다. 또한 정화수에는 하늘의 정기가 몰려있기 때문에 여기에 보음(補陰)약을 넣고 달여서 오래 살게 하는 알약(환)을 만들 수 있다.

<동의보감>에는 물의 여러 종류가 분류되어 있다. 그중 정화수가 그 으뜸이다. 정화수 말고도 정월에 처음으로 내린 빗물인 '춘우수', 겨울철에 내린 서리인 '동상', 조개껍데기를 밝은 달빛에 비추어 받은 물인 '방제수'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정화수는 씻김굿의 역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씻김굿과 정화수, 경계 넘기의 술'-이윤선,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사상, 2020년 1월호) 씻김굿이란 일반적으로 '죽은 이의 영혼을 깨끗이 씻어주어 이승에서 맺힌 원한을 풀고 극락왕생하기를 비는 굿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된다. '영돈말이'라고도 불리는 남도 씻김굿의 하나인 '이슬털이'는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서 이루어지는 '씻기는' 행위에 포함된다. 일상에서의 세수나 샤워 또는 민간 제사에서 사제자나 제사 담당자가 목욕재계를 하는 물로 씻는 행위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슬털이와 영돈말이는 증류주를 내리는 소줏고리의 모양과 과정에서 유사성을 띠고 있다. 이슬털이의 과정은 망자의 옷을 넣어 말아둔 원통형의 돗자리를 세워 그 위에 원반 모양의 온누룩을 놓고, 종이 넋을 담은 밥그릇을 올려둔다. 증류주의 한 종류인 진도 홍주의 과정은 쌀과 누룩을 빚어서 익힌 술이나 술지게미를 솥에 넣고, 그 위에 시루를 놓은 다음 솥뚜껑을 뒤집어 덮는다. 뒤집은 솥뚜껑의 손잡이 밑에 주발을 놓고 솥에 불을 때면 증발된 알코올이 솥뚜껑의 냉각수에 의해 응축된다. 이러한 과정의 유사성에서 이슬털이에서 누룩을 사용하는 이유나 그 이름의 이유를 '술을 만들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화수는 또한 천도교와 원불교 제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불단에 올리는 정화수를 청수라고 하는데, 청수는 천도교 제례 의식에 깨끗한 물을 그릇에 떠다 모시는 것으로 정화수와 그 의미가 비슷하다. 물의 정화력과 청정, 생명력 등의 상징성이 믿음의 대상이 되면서 각종 종교에서 물 신앙을 수용하여 물법 신앙 또는 찬물 신앙이 형성된 것이다. 여기에는 물의 치병력, 사악함과 부정을 쫓는 힘, 천지 조화력, 재생력 등에 대한 신앙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단에 청수를 올리는 행위의 의미는 민속신앙 속 주술적 의미보다는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정화수와 같이 맑고 깨끗하기를 바란다는 점을 담고 있다.

과학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풍속신앙이나 주술적 행위는 그 의미를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평범한 물건이나 행위에 우리가 간절한 마음과 소망을 투영한다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영진전문대 호텔항공관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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