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대구경북 경제의 기둥 '장수기업' (2)…대구 100년 기업 등극 카운트다운 '경북광유' '풍국면' '화랑고무'

  • 홍석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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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3-31 08:51  |  수정 2023-03-31 09:33  |  발행일 2023-03-31 제34면
KK의 첫 걸음이 된 대구오일상회의 초창기 풍경(왼쪽)과 포항 상원주유소 오픈 때 모습.
대구유통단지에 위치한 추억의 점보지우개 산실인 화랑고무 전경.
화랑고무 최봉인 대표 근무 모습.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이 문구는 독일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한 구절인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영화 '황산벌'에서 극 중 김유신의 명대사이기도 하다. 약 100년이라는 대구 산업의 역사 속에서 아쉽게도 아직 100년 기업은 없다. 대구산업의 역사에서 한때 지역 경제를 선도했던 섬유, 건설, 기계부품뿐만 아니라 시장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혁신의 과정을 거친 전문기업 중에서 100년 기업이라는 영예를 눈앞에 두고 있는 곳이 적지 않다. 지역에서 시작해 전국적인 명성을 가진 기업으로 성장한 경북광유나 풍국면 등 100년 기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역 장수기업의 유전자를 살펴본다.

1927년 창업 '경북광유'
올해로 96살 맞은 대구 최장수 기업
석유 가게 시작 'KK 주식회사' 변모


경북광유
광복 이후 경북광유 본사 전경.
KK주식회사. 대구 최고(最古) 기업이다. 1927년 창업했으니 올해로 96살이 된 장수기업이다. 우리나라에 100년 이상 된 기업이 7곳에 불과한 것을 감안하면 역사적으로 상위에 위치하는 곳이다. 그런데 100년이 다 된 곳인데 이름이 낯설다. KK주식회사의 원래 이름은 '경북광유'다.

회사의 창업주는 박재관이다. 1927년 대신동에서 대구오일상회를 개점했다. 일제 강점기 대구에서 조선 사람이 처음 연 석유 가게였다. 초창기 대구오일상회의 영업은 일본 자본이 세운 조선석유로부터 석유를 공급받아 소비자들에게 파는 것이었다. 당시 석유의 가장 큰 용도는 호롱불을 밝히는 재료여서 홉 또는 되 단위로 판매했다.

초창기에 자전거로 대구 지역은 물론 인근의 칠곡, 멀리는 안동 지역까지 배달했다. 배달 양이 많아지면서 자전거 외에 달구지로도 석유를 배달했다. 6·25전쟁 후엔 낡은 군용 트럭을 개조해서 석유를 날랐다. 탱크로리라 부르는 전문 배달차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였다.

경북광유의 사업에 경영이 접목된 것은 1949년이다. 미국 텍사스 석유회사와 대리점 계약을 체결하면서 회사 이름도 대구오일상회에서 경북광유로 바꾸었다. 이후 포항에 지점을 개설하고, 1956년 신암주유소를 개설하는 등 경북광유는 건실하게 성장했다. 주로 등유를 파는 회사로 시작했지만 1963년 구룡포에 어선용 중유 탱크를 설치하는 등 사업영역도 넓혀 나갔다. 1964년엔 대한석유공사와 경상북도 대리점 계약을 체결하여 사세를 확장했다.

1969년 박진희가 2대 CEO에 취임하면서 가업이 이어졌다. 박진희 회장은 1969년부터 1997년까지 총 37개의 주유소를 개설했고 그것은 경북광유의 매출 증대로 이어졌다.

박진희 회장은 1997년 별세 후 자녀들 사이에 회사를 매각할 것인지, 존속할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갈린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박윤경(현 KK주식회사 회장) 등의 의지로 회사는 존속하게 되었다. 3대 CEO인 박윤경은 1999년 부사장으로 취임하며 본격적으로 경영에 참여했다. 2001년 공동대표이사에 취임했고, 2005년 단독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대구의 최장수 기업이라는 점에서 KK주식회사는 긍지를 가질 자격이 있는 기업이다. 대구 시민에게도 '우리 지역에 이렇게 오래된 기업이 있다'는 점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기업이다.

1933년 설립 '풍국면'
전국 最古 국수 공장…창업후 면만 만들어
대기업 공세 밀리다 대형마트 입점 재도약


풍국면2
대구 북구 노원동 풍국면 본사 건물.
국내 최고 수준 35% 메밀이 함유된 풍국면 메밀면.
대구는 국수와 뗄 수 없는 도시다. 국수 소비량도 많고, 국숫집도 즐비하다. 일제 강점기 국수산업이 가장 활성화된 곳이 대구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대구가 전국 국수시장의 50% 이상을 독점하던 시기도 있었다.

특히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국수공장이 대구에 있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은 1933년에 설립한 이후 국수 면만 만들어 온 풍국면이다. 대한상공회의소 기준 대구에서 셋째로 오래된 기업이다.

풍국면이 처음부터 국수공장으로 시작한 건 아니다. 1933년 중구 대신동에서 마루요시 제분·제면으로 출발한 국수공장을 나중에 인수했다. 풍국면의 황금시대는 1970년대다. 대한민국 최고의 국수 브랜드로 성장했다. 당시 풍국면의 TV 광고 모델이 신성일과 엄앵란이었으니 굳이 더 설명이 필요할까.

하지만 라면이 급성장하는 1970년대를 거치면서 위기가 찾아왔고 창업 40년여 만인 1979년, 풍국산업이 사업 합리화에 따라 풍국면을 포기하면서 서문시장 최대 쌀 도매상 주인 최정수에게 이를 매각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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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 4 풍국면은 자동화 설비를 통해 위생과 식품 안전에 만전을 갖추고 제2의 도약기를 마련했다. 5 전국으로 팔려나가는 최고의 국수 풍국면의 다양한 생산품들.
1985년 오뚜기를 비롯한 식품 대기업들이 국수 시장에 뛰어들면서 풍국면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다. 최익진 풍국면 대표가 1993년 가업을 잇기 위해 내려왔을 때만 해도 풍국면의 부채는 매출보다 많았다.

이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이 대형마트 입점. 미국 유학 시절에 대형 할인점을 경험했던 최 대표는 대형 마트의 급성장을 예상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95년 이마트에 PB(대형마트 자체 브랜드) 제품 납품권을 따내기에 이른다. 이마트의 손을 잡으면서 풍국면의 매출도 날개를 달았다.

위생과 식품 안전을 위한 노력도 병행했다. 연매출이 28억원이던 2003년에 40억원짜리 자동화 생산 설비를 들였다. 곧이어 '쓰레기 만두' 파동으로 식품위생 개념이 부각되자 풍국면의 몸값은 급상승했다. CJ제일제당의 프리미엄 브랜드 '제일제면소'와 코스트코홀세일에 납품을 시작했다.

우여곡절을 빠짐없이 겪은 풍국면이 100년의 역사를 쓰기 위한 카운트다운이 이제 10년도 남지 않았다. 풍국면의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미래를 기대한다.

1950년 설립 '화랑고무'
韓 첫 지우개 제조…'점보 지우개' 탄생
세계로 수출…中선 명품 지우개로 대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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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고무의 다양한 제품들.

지우개는 어린 시절 종이가 닳을 정도로 지우고 또 지웠던 추억의 물건이다. 물론 개구쟁이들이 승부를 겨루는 도구가 되기도 했지만. 그런데 지우개의 산실이 대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구 북구 산격동 끝자락에 있는, 반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오로지 지우개만 만들어 온 화랑고무가 주인공이다.

1950년에 설립된 화랑고무는 대구에서 여섯 째로 오래된 기업으로, 한국 최초로 지우개를 만든 기업이자 국민 지우개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점보 지우개'가 탄생한 곳이다. 한때 시장점유율 90%를 자랑했던 점보 지우개는 창업주 고 최세정 회장이 야심차게 만든 브랜드로, 히트 아이템이자 지금도 여전히 생산되고 있는 장수제품이다.

화랑고무의 탄생은 평양 출신 최세정 회장이 6·25전쟁 당시 대구에 피란을 내려온 것이 계기가 됐다. 원래 광복 직후 서울에서 고무 계통 장사, 공 장사를 했었다는 최세정 회장은 대구에 와서는 남의 공장을 빌려서 지우개를 만들기 시작했다.

1950년 9월 대구 북구 칠성동에서 설립된 이 회사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지우개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규모의 지우개 공장을 가진 화랑고무의 지우개는 지금도 전 세계 각지로 수출되고 있다. 1980년도에는 세계 34개국에 수출했던 적도 있다고. 그리고 요즘의 가장 큰 시장은 중국. 특히 중국에서는 최고의 명품 지우개로 인정받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화랑고무는 2002~2004년 '4B네모나' '4B디자인' '4B점보' '화랑' '화랑고무' 등 100% 한글 브랜드로 중국 정부에 상표등록까지 마쳤다.

화랑고무는 현재 3세 경영 중이다. 최정은 대표이사가 2005년 회사에 입사해 경영을 맡고 있다. 한글로 상표를 찍어도 중국에서 명품 대접을 받듯이 대구라는 이름이 화랑고무의 날개가 되어주기 위해서는 한국 최초의 지우개 공장이 대구에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지역민들도 자랑스러워 해야 할 것 같다.

홍석천기자 hongsc@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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