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날] 달성 비슬산 자락 3대 사찰…누구나 대웅전 들어 참배·참선·명상

  • 강승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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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5-19 08:11  |  수정 2023-05-19 08:17  |  발행일 2023-05-19 제12면

매년 5월 이맘때쯤이면 사찰 입구와 절 마당에서 연등을 볼 수 있다. 마치 잔칫집 분위기 같다. 형형색색의 연등이 파란 하늘, 녹색의 나뭇잎들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낸다. 사찰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대웅전은 누구나 참배할 수 있고, 잠시 앉아 참선이나 명상도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자유다. 온갖 산새들의 어우러진 노랫소리는 최고의 음악이다. 이 계절에는 밤낮을 안 가리고 개구리들의 합창도 들을 수 있다. 대구 달성에는 비슬산 자락에 사찰이 집중돼 있다. 불교가 융성했던 때에는 99개의 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3곳이 대표 사찰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그 중심이 대견사다. 유가사와 용연사 역시 한국불교의 내일을 열어가는 근본 도량으로 알려졌다.

대견사
대구 달성 유가읍 용리 비슬산 정상에 중창된 대견사. 대견사는 191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달성군 제공

    대견사    
당나라 문종이 찾아낸 명당 사찰 터
관음석상이 땀 흘리자 조정에 알려


대견사(주지 법희 스님)는 10년 전만 하더라도 3층 석탑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산문이 다시 열린 때가 2014년 3월1일. 복원된 지 9년 지났다. 위치는 비슬산 정상 부근이다. 안내문에는 대견사를 '크게 보고, 크게 느끼고, 크게 깨우친다'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대견사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42대 흥덕왕 때 창건한 사찰이다.

당나라 문종(文宗)이 큰 절을 지을 곳을 찾았는데, 하루는 얼굴을 씻으려고 떠놓은 대야 물에 아주 아름다운 경관이 나타났다. 이곳이 절을 지을 곳이라 생각한 문종은 사신을 파견해 찾게 했다. 결국 중국에서는 찾을 수 없게 되자 신라로 사람을 보내 찾아낸 곳이 대견사 터다. 이 터가 대국에서 보였던 절터라고 해 절을 창건한 뒤 대견사로 명명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창건 이후의 역사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1416년(태종 16)과 1423년(세종 5)에 이 절에 있던 장륙관음석상(丈六觀音石像)이 땀을 흘려 조정에까지 보고됐다. 1900년 영친왕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이재인(李在仁)이 중창했지만, 1908년 허물어지기 시작해 1917년 다시 폐허가 됐다. 2011년 11월 달성군이 대견사 재건 공사를 진행했다. 2014년 3월 적멸보궁·요사채·산신각·목조와가 등 건물 4동이 완공됐다.

현재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길이 30m, 높이 6m의 축대가 남아 있고, 무너진 9층 석탑과 거대한 석조선각불상, 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동굴대좌(洞窟臺座) 등이 있다. 이 중 축대는 현재까지 온전히 보존돼 있다. 동굴은 참선 또는 염불도량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가사
달성 유가읍 양리에 위치한 유가사. <유가사 신도 제공>

    유가사    
전성기때 승려 3천여명 머문 대종찰
전쟁·기근마다 빌던 유물 괘불 모셔


달성 유가읍 양리에 위치한 유가사(주지 도휘 스님)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 말사다. 827년(신라 흥덕왕 2년) 도성국사가 창건했다. 절 이름은 비슬산의 바위 모습이 아름다운 구슬과 부처의 형상과 같다고 해서 옥 유(瑜), 절 가(伽) 자를 따서 지어졌다. 전성기에는 3천여 명의 승려가 머무른 대종찰이었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탔다. 1682년(숙종 8) 도경이 대웅전을 보수한 데 이어 1729년(영조 5) 취화와 파봉(巴峰), 1760년 보월, 1776년 밀암, 1797년 낙암이 각각 중수 또는 중창한 바 있다. 1976년부터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켜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해 용화전·산령각·범종루·천왕각·백화당·나한전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정면·측면 각 3칸으로 내부에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1964년 우송(友松)이 제작한 칠성탱화와 신중탱화가 함께 모셔져 있다. 용화전은 정면·측면 각 1칸으로 내부에 높이 102㎝인 석조미륵불좌상이 있다.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 건물로 석가모니삼존불과 후불탱화, 삼존불 좌우에 각 8폭씩 십육나한도가 있다. 산령각은 정면·측면 각 1칸으로 1976년에 조성된 산신탱화와 독성탱화가 자리하고 있다.

유물로는 괘불과 삼층석탑, 낙암과 월호(月湖) 등 15인의 승탑이 서 있다. 승탑은 모두 석종형으로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또 괘불은 가뭄과 질병, 왜군의 침략 때마다 마을 주민들이 찾아가 소원을 빌던 유물이다. 삼층석탑은 1920년 인근 원각사지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높이 3.64m로 고려시대 유물로 추정된다.

용연사
달성 옥포읍 용연사 입구. <용연사 신도 제공>

    용연사    
통일신라 승려 보양이 창간한 사찰
도난된 불화 독성도 35년만에 귀래


용연사(주지 능도 스님)는 옥포읍 비슬산 자락에 있다.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승려 보양이 창간한 사찰이다. 이후의 고려시대까지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1419년(세종 1) 천일이 중건했지만, 임진왜란 때 불 탔다.

1603년(선조 36) 탄옥(坦玉)·경천(敬天) 등이 사명대사 유정(惟政)의 명으로 중창했다. 1621년(광해군 13) 범종각을 지었지만, 1650년(효종 1) 다시 법당과 요사채 등이 모두 불에 탔다. 1653년에는 홍묵이 대웅전을 지었고 승안(勝安)이 명부전을 건립했다. 1655년 희감과 홍묵이 함허당과 관정료를 세웠고 이듬해에는 청진이 관음전을 지었다. 1658년에는 도행이 명월당을, 이듬해에는 학신이 향로전을, 1660년(현종 1)에는 일순이 약사전을 차례로 건립했다.

1722년(경종 2년)에는 대웅전과 종각을 수리했고, 당시 절 규모는 200여 칸에 이르렀다. 거주하는 승려는 500여 명에 달했다. 현존하는 건물은 극락전, 적멸보궁, 나한전, 일주문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539호인 석조계단과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26호인 삼층석탑, 극락전 등이 있다.

한편 1987년 8월 도난당한 불화 독성도가 지난해 35년 만에 귀래했다. 독성도는 용연사 극락전에 봉안됐던 불화다. 1871년 제작돼 경북 청도 적천사의 백련암에 모셔졌으나 조선 말 암자가 폐사되면서 옮겨졌다. 독성도는 화면 중앙에 산수를 배경으로 늙은 독성이 자리한다. 독성을 단독으로 신앙한 전통은 조선 후기에 성립됐다. 남방불교권은 물론 북방불교권인 중국, 티베트, 일본에서도 보이지 않는 한국 불교 특유의 형태다.

강승규기자 kang@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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