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시론] 임산부도 없고 배려도 없는 '임산부 배려석'

  • 변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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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6-14 06:56  |  수정 2023-06-14 17:49  |  발행일 2023-06-14 제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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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현 편집국 부국장

얼마 전 다소 늦은 출근길이었다. 지하철(대구도시철도) 출입문 안으로 팔십은 족히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들어왔다. 딱 한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하필 임산부 배려석이었다. 객차 안을 한 번 쭉 훑어보던 할머니는 잠시 망설이더니 그 빈자리에 앉았다. 엉덩이를 살짝만 걸친 모습이 의아했지만 임산부석이 '경로석'이 된 지 오래여서 뭐 그리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음 역이 가까워졌을 때다. 반대편에 앉아 있던 승객 중 한 명이 하차를 위해 일어서자 할머니도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 젊은 승객이 비운 자리로 곧장 달려갔다. 앞서 배려석에 앉을 때 쭈뼛쭈뼛하던 모습과 달리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

"아니, 그냥 앉아 계시지. 위험하게 자리를 왜 옮기세요." 큰 목소리를 지닌 옆자리 아주머니가 타박 반, 걱정 반 섞어 물었다. 그러자 할머니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그 자리는 임산부 자리 아니냐. 비워 둬야지." 목적성이 분명한 임산부 배려석이라지만 당시 서 있는 승객이 한 명도 없었고, 더군다나 또 다른 교통약자인 고령의 할머니가 앉겠다는데 누가 토를 달겠냐마는 사리를 분별하려는 할머니의 돌직구는 묵직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일순간 멍해진 것도 잠시. 할머니에게 빼앗겼던 시선을 거둬 다시 임산부 배려석으로 돌렸더니 이번엔 가슴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 자리는 70대쯤으로 보이는 한 남성의 차지가 돼 있었다.

2015년 서울지하철을 시작으로 전국의 임산부 배려석이 분홍색 시트로 교체됐다. 임산부를 좀 더 적극적으로 배려하기 위해 좌석을 시각적으로 확연하게 구분한 것이다. 바닥에는 '임산부 배려석'임을 알리는 분홍색 스티커를 마치 카펫처럼 깔아 놓았다. 서울지하철에는 '핑크카펫, 내일의 주인공을 위한 자리'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대구도시철도에도 객차마다 두 자리씩 임산부 배려석을 마련해 뒀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임산부 배려석에는 배려도 없고 임산부도 없다. 그 자리엔 늘 임산부 같지 않은 사람이 앉아 있다. 심지어 나이 든 남성도 앉는다. 배려 없는 사회, 초저출산 국가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이 현실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누군가 임산부 배려석에 꽃다발을 놓아뒀다. 꽃은 알스트로메리아. 임신 축하 선물용으로, 꽃말은 '배려' '새로운 시작'이다. 새로운 생명을 위해 좌석을 양보하는 배려를 보여 달라는 메시지였다. 이에 힌트를 얻은 공공소통연구소 LOUD가 서울에서 퍼포먼스형 캠페인을 진행했다. 꽃다발 대신 조그마한 테디베어 인형을 임산부 배려석에 앉히고, 인형 목에는 '임산부 배려석입니다. 저를 안고 앉으세요. 내릴 때는 제자리에'라고 적힌 팻말을 걸어 뒀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넛지(Nudge) 같은 효과가 나타나면서 승객들이 배려석을 비우기 시작했다. 테디베어는 누군가로부터 배려석을 지키고, 또 누군가를 배려하는 수호자가 됐다. 물론 인형이 사라지는 일도 없었다. 무엇보다 티가 나지 않아 양보받지 못했던 임신 초기 여성들이 당당히 인형을 안고 앉기 시작했다.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 두는 일, 그것은 그 자체로 '배려'를 상징하는 실천적 행위다. 노약자·장애인 보호석을 비워 두는 것과 마찬가지다. 양보해 달라는 말도 못 한 채 눈치 보며 서 있는 임산부가 없도록 대구교통공사 측에서 테디베어 같은 발상을 해줬으면 좋겠다. 그날 '임산부 배려석은 비워 둬야 한다'는 지하철 할머니의 말 때문일까. 오늘도 그 분홍좌석에 가장 먼저 눈이 간다.변종현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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