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만진의 문학 향기] 열흘 만에 끝난 이야기

  • 정만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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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6-16  |  수정 2023-06-16 08:09  |  발행일 2023-06-16 제16면

[정만진의 문학 향기] 열흘 만에 끝난 이야기
정만진 소설가

1313년 6월16일 '데카메론'의 작가 보카치오가 태어났다. '데카메론'이 완성된 때는 1353년으로, 흑사병 대유행으로 피렌체에서만 10만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한 직후였다. 영국 인구 1/4이 흑사병으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영국 국왕은 극심한 흑사병 탓에 매우 곤혹스러웠을까.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기우에 불과했다. 농민들이 워낙 많이 죽자 중세 사회의 기본 틀인 장원 제도가 붕괴되었고, 그 바람에 제후들이 망하면서 왕권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흑사병 창궐이 튜더 왕조 창업주 헨리 7세에게는 행운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데카메론'에 등장하는 10명의 신사 숙녀들에게도 흑사병은 아무 문젯거리가 아니다. 그들은 피렌체를 벗어나 아름다운 시골 별장에서 논다. 하는 일이라고는 날마다 각각 한 가지씩 재미있는 이야기를 말하고, 그것이 끝나면 노래하고 춤추며 하루를 마감한다. 그저 "인생은 아름다워"일 뿐이다.

10명이 10일 동안 재미있는 이야기를 각각 10가지씩 소개했으므로 '데카메론'은 단편 100편으로 이루어진다. 기독교 관련 일화 중 맨 앞에 나오는 자노 드 세비네의 경험담을 살펴본다.

프랑스 부자 상인 자노 드 세비네가 유대교 신자인 친구 아브라함에게 교황청을 한 번 구경해 보라고 제안한다. 기독교의 오묘한 진리에 감동하게 되리라 장담하면서.

아브라함은 교황청과 성직자들의 세계를 둘러본 후 "과연 기독교는 좋은 것"이라면서 "나도 기독교를 믿겠다!"라고 선언한다. 이유가 놀랍다. "기독교 성직자들이 뇌물, 협잡, 매춘 따위에 절어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망하지 않고 있다. 이는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주는 분명한 증거이다!"

'데카메론'에는 기독교 성직자들을 힐난하는 이야기가 많다.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거렸다는 1633년보다 대략 280년 전에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을 발표했다. 그러고도 보카치오는 어떻게 종교재판 회부 없이 무사히 생존했을까.

그 불가사의에 고개가 저절로 갸우뚱해진다. 보카치오는 '데카메론' 발표 후 더 이상 리얼리즘 문학을 창작하지 않았다. 써놓았던 산문들을 불태워 없애려다가 생애의 스승으로 공경해온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의 만류로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는 말도 전해진다. '데카메론'은 말 그대로 '열흘 동안의 이야기'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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