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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현 <시인> |
시인에게 원고 투고는 어느 정도 숙명이라 할 수 있다. 정말 운 좋게 출판사에서 출판 제의를 해 오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흔치 않다. 대부분은 출판사 원고 투고란에 작품을 보내는데, 원고를 출력해서 보내기도 하지만 내 경우는 e메일로 보낸다. 그때부터가 시작이다. 편집자가 금방 메일을 확인하지도 않거니와 열어본 표시만 있고 답이 없다. (대형 출판사는 3개월 정도 숙의 기간이 있음을 공지한다.) 긴 기다림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그나마 반려의 이유를 설명하는 출판사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얼마 전, 시 원고 투고를 해놓고 밤마다 메일을 열어봤다. '이만하면 괜찮지 않아?'를 스스로 다독이며 편집회의가 있다는 30일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그사이 원고를 두 번 더 열어봤고 그때마다 마음이 반반이었다. 안 될 것 같기도 될 것 같기도, 날짜가 가까워지면 메일 알림이 뜨는지 확인하고 내려놓기를 반복한다. 아쉽게 반려되었다는 메일을 받으며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다만, 좌절할 필요는 없다. 원고를 투고하기까지 원고를 다듬던 몰입의 과정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어쩌면 그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때 사실 시를 가장 많이 쓰기도 한다.
"초반의 시에 비해 후반부로 가서 조금 완성도가 못 미친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다소 소재적으로 느껴지거나 조금 더 머물러 읽고 싶은데 시가 끝나 버리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이런 피드백을 받으면 정말 고맙다. 그때부터 내 원고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원고 파일을 열고 찬찬히 읽어 내려가면 '아! 설명이 많았구나!' '이 부분은 너무 급하게 끝내버렸구나!' 보이기 시작한다. 글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나를 넘어선 글은 있을 수 없다. 조급한 마음을 앞세우고 글을 쓰면 글도 조급해진다. 편수를 채우기에 급급해 비슷한 소재를 끌어와서 썼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투고하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원고를 안고 기다리면 그냥 원고일 뿐이다. 투고와 반려를 거듭하면서 조금 나은 원고를 갖게 된다. 동료 시인이 "나 얼마 전 원고 까였잖아!" 이렇게 말하면 묘한 위로가 된다. 우리가 아는 작가들 대부분은 비슷한 경험을 하고 비슷한 과정을 거쳐 책을 펴낸다. 아홉 번 투고 끝에 책이 나오게 되었다는 어느 시인의 인터뷰를 보며, 그 시집은 무조건 사봐야겠다 마음먹었다. 아홉 번의 투고와 반려의 과정 자체가 삶이자 시이기 때문이다. 시가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삶이 시를 구원한다는 문장을 읽은 적 있는데, 난 이 말의 진의를 조금 알 것 같다.
임수현 <시인>

임수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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