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산책] 하인리히 뵐 '여인과 군상'

  • 정인모 교수 (부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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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9-01 08:39  |  수정 2023-10-11 13:29  |  발행일 2023-09-01 제25면
'살 만한 나라' '살 만한 언어'를 꿈꾸다
戰後 독일이 직면한 새로운 상황
인간성·정신적 폐허 적극 비판
휴머니즘·유토피아적 인물 통해
암울한 현실 사회에 경종 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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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모(왼쪽) 교수와 하인리히 뵐 아들 르네 뵐.<정인모 교수 제공>
전후 독일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하인리히 뵐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지도 50년이 넘었다. 1972년 수상자로 발표되었을 때, 그는 국제 펜클럽 회장으로 이스라엘 여행 중이었다. 뵐 이전에 토마스 만(1929년), 헤르만 헤세(1946년), 유대인 여류작가 넬리 작스(1966년)가 스웨덴의 한림원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섰지만, 이들 모두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식적으로는 독일 국적이 아니었다. 이들 세 작가는 모두 독일어로 작품을 썼지만 토마스 만은 나치로부터 독일 국적을 박탈당한 후 미국 시민이 되었고, 헤세와 작스는 각각 스위스와 스웨덴 국적이었다. 그래서 뵐 자신의 말처럼 그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1912년) 이래로 독일인으로는 60년 만의 일이었다.

하인리히 뵐이 독일에서 맞이한 세상은 암울했다. 1917년 1차 대전이 끝날 무렵 쾰른에서 출생한 뵐의 유년과 청소년 시절은 경제적 어려움이 극심한 때였고, 크고 작은 정치 사회적 혼란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는 이 시기에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의 명멸과 히틀러의 제3제국의 준동을 직접 목도한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을 때, 당시 쾰른 대학 독문과에 재학 중이던 뵐은 독일군으로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삶을 무의미하고 부조리하게 만들고, 인간의 존엄성을 철저히 앗아가는 '장티푸스와 같은 존재'로 전쟁을 체험한다. 이러한 전쟁 체험과 기억은 적지 않은 그의 작품의 주제나 배경이 되었으며, 이는 후기 작품에까지 계속되었다.

전장에서 돌아온 뵐은 전후 독일 사회가 빚어내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 상황과 그것이 빚어내는 폐해를 직시하고, 작품을 통해 이를 적극적으로 비판한다. 전후 서독은, '벌채' 혹은 '제로 상황' '새로운 시작'이라는 전후의 거대 담론 아래, 소위 '라인강의 기적'이라 일컫는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에 따른 새로운 정치 사회적 불안(화폐개혁, 군비 재무장 등)과 인간성 및 정신적 폐허 상황이 대두된다. 이때 뵐은 '업적사회'로 상징되는, 전후 재건에만 몰두하는 서독 사회에 맞선다. 그는 무엇보다 인간의 가치와 인간성 회복을 주창한다. 그는 이 과정에서 '글쓰기와 행동의 일치'를 신조로 내세우면서, 사회적 참여(앙가주망)의 작가 정신을 실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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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뵐(Heinrich Boll) 정인모 교수 제공
뵐의 이와 같은 문학관이 가장 잘 반영된 작품은 1971년에 발표된 '여인과 군상'이다. 이 작품에는 1920년에서 1970년 사이 독일의 역사적 사건, 독일의 근대 역사가 총체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뵐의 노벨상 수상이 그의 전체 작품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문학평론가 코른의 말처럼 이 작품이야말로 '뵐 작품 중 가장 중요한 대작으로 일컬어지며, 지금까지 작품 가운데 그에게 면류관을 씌운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레니라는 한 여인과 그녀를 둘러싼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변 인물들의 레니에 대한 회상이나 평을 통해 독일의 현실이 반영되고 있으며, 다양한 인물군상을 통하여 독일 역사가 기록되고 있다. 뵐은 레니에게 각별한 인간성을 부여한다. 그녀는 이 세상의 물정을 모르는 비사회적 인물이다. 그녀는 신발이나 옷도 유행이 지난 것을 걸치고 다니며, 가난한 외국 노동자들에게 세를 받지 않고 집을 무상으로 임대한다. 그녀가 사귀는 남자는 독일인이 아닌 러시아, 튀르키예인인데, 이는 인간의 인간 됨이 인간이 만든 제도나 국적 등으로 재단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작가의 의도적 인물 설정이다. 레니는 다소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힘든 유토피아적 인물로 드러나지만, 뵐은 이를 통해 현실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작품의 핵심적인, '업적원칙' 거부 모티브가 강하게 드러난다. 다시 말해 1960년대에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주창한 '도구적 이성'을 비판하면서, 마르쿠제의 '위대한 거부'가 작품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뵐은 여기서 나아가 학교, 군대, 교회와 같은 기구 또는 제도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구들은 업적원칙을 내세우면서, 인간의 창의성을 박탈하고, 획일적 사고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뵐은 이러한 면에서 제도와 규범을 거부하는 무정부적 성향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성향은 그가 어떤 그룹이나 신조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경향에서도 잘 드러난다. 예를 들면, 뵐은 서독의 전후 문학을 선도해온 '47그룹 상'을 받기는 하지만 그는 47그룹 활동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뵐의 이러한 태도는 종교관에까지도 미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그의 작품의 핵심을 이루지만, 그는 교회라는 기구(또는 제도)에는 부정적이다. 오히려 교회는 한 개인의 신앙생활을 방해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제도로서의 교회를 거부하고, 개인적인 신의 은총을 체험하기를 희구한다. 그는 교회라는 종교 기구나 교리가 오히려 순수한 기독교적 실행(이를테면 이웃사랑)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급기야 1976년에 종교세 납부를 거부한다. 당시 논란이 되었던 '어릿광대의 고백' (1963)도 바로 이러한 점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뵐의 작품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것 가운데 하나로 주목되는 점은 휴머니즘이다. 그는 작품에서 외국인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나타내는데 이는 그의 휴머니즘 정신의 발로이다. 그는 모든 인간은 인간 그 자체로 존재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휴머니즘을 강력하게 설파한다. 그의 작품에서 주인공의 주요 파트너로서 등장하는 '열차 시간은 정확하였다'의 올리나, '아담, 너 어디 있었니?'의 일로나, '여인과 군상'의 보리스와 메메트 등 이들 모두는 외국인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독일전후 작가 중 이러한 이민·난민 문제를 선구적 시각으로 다루면서 타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힌 작가로 하인리히 뵐만 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언론의 폭력성에 대해서 주목하면서 이를 선제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에서 언론의 폐해와 '소문 살인'을 주제로 다루었다. 원래 이 작품은 1970년대 초 독일에서 발생한 적군파의 테러와, 이에 대한 독일 최대의 언론 콘체른 악셀 슈프링어 사의 폭력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뚜렷한 증거 없이 테러의 배후 세력으로 '바더-마인호프'를 지목한 언론의 그릇된 보도 태도와 결국 이와 같은 '명예(소문) 살인'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위험성을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하인리히 뵐에게서 어떠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까? 이는 '뵐처럼 현대 사회의 문제를 그토록 선구적으로 다룬 작가가 또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볼 수 있다. 뵐은 초기 문학에서 전쟁과 그 비인간적 상황의 문제를, 또 인간 개인을 억압하는 기구나 제도의 폭력성과 교회와 신앙의 관계를, 그리고 외국인(이민) 문제, 현대인이 겪는 업적(성과) 지상주의를 다루었다. 그리고 중기를 넘어서면서 언론의 폐해, 테러와 핵 문제와 같은 거대 담론은 선제적으로 다루고 있다.

뵐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 말하면서 전쟁의 부조리함, 전후 상황에서 상실한 인간성, 점차 업적 혹은 성과 위주로 흘러가는 경쟁 사회, 국적이나 인종으로 인간을 가르는 폐행, 기구나 조직으로 인간의 자유를 옥죄는 상황 등을 작품 속에 선구적으로 내비추고 있다. 이런 점에서 뵐은 '살 만한 나라' '살 만한 언어'를 꿈꾸며, 글쓰기와 실천의 일치를 주장한 현대 대표적 앙가주망 작가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이다.


정인모 교수 (부산대)
공동기획: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HK+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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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모 교수 (부산대)
부산대 독어교육과 교수. 한국 독일언어문학회 회장, 한국 하인리히 뵐 학회 회장, 부산대 사범대학 학장 및 교양교육원장 역임. 현재 DAAD 리서치 앰버서더로 활동.

주요 저서로는, '독일문학 감상'(새문사, 2012), '하인리히 뵐의 문학세계'(부산대학교 출판부2007), '인공지능시대 문학과 예술'(공저·부산대 출판부 2020), '호모 미그란스'(공저·역락, 2022) 등이 있고, 대표 논문으로는 '계몽과 경건의 변증법- 18세기 독일 사상의 지형도'(기독교학문연구회, 2018), '하인리히 뵐의 타자에 관한 이해 - 여인과 군상을 중심으로'(한국독어독문학교육학회, 2020), '애완에서 반려로 - 모니카 마론 작품에 나타난 피조물성'(한국독일언어문학회, 2022) 등이 있음. 주요 관심사는, 이민(난민) 문제, 융복합 시대의 통섭적 사유, 노년 및 생태 문학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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