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의 그단새] 마당에 산토끼가 들어온 날

  • 안도현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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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9-19  |  수정 2023-09-19 06:56  |  발행일 2023-09-19 제23면

[안도현의 그단새] 마당에 산토끼가 들어온 날
안도현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나는 마당이 좀 넓은 집에 산다. 울타리의 절반은 돌담이고 절반은 철제 펜스다. 펜스를 직접 설치해보자며 사촌 동생이 제안했고 나하고 아내는 더듬거리며 콘크리트에 구멍을 내어 펜스를 고정하는 '앵커'작업을 거들었다. 울타리를 세우는 일은 안과 밖의 경계를 명확하게 확정하는 일이다. 마당 안쪽이 내 소유의 땅이니 아무도 함부로 드나들지 말라는 것. 그것은 울타리 바깥에 대한 매정한 선 긋기 같기도 했다.

작업은 이틀이 걸렸고, 펜스 설치를 마무리할 때쯤이었다. 산토끼 한 마리가 빈틈을 어떻게 알았는지 작은 구멍으로 마당에 들어왔다. 잿빛 털옷을 입고 있었고, 뒷다리가 눈에 띄게 길었다. 저놈 고라니 새끼 아니야? 나는 소리를 질렀지만 길쭉한 두 귀를 보니 토끼가 분명했다. 내가 펜스 치는 솜씨를 이놈이 우습게 알고 나 잡아 봐라 하고 들어온 거 아녀? 사촌 동생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쨌거나 야생의 산토끼가 마당에 들어온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열두어 살 무렵 외갓집 앞산에서 멀리 달아나는 산토끼를 본 후 생전 처음이었으니까.

저놈을 잡아보자. 울타리를 둘렀으니 들어온 곳만 막으면 산토끼는 독 안의 쥐였다. 나는 산토끼에게 빠르게 다가갔으나 그는 열무와 상추가 자라는 텃밭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게 아니라 축구공처럼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토끼는 정말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산토끼는 울타리를 따라 울타리와 함께 달렸다. 아니 울타리보다 빠르게 달렸다. 내가 다가갈수록 더 빠르게 가속이 붙었다. 나는 주저앉아서 노래를 불렀다.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충깡충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

요즘은 고양이들이 산으로 들어가 토끼를 해치는 통에 산에 토끼가 없대요. 귀한 놈이죠. 사촌 동생도 망치를 내던지고 토끼를 쫓다가 포기했다. 우리가 울타리를 치고 있다는 걸 저놈이 어떻게 알았을까요? 나는 짐짓 잘난 체하면서 대답했다. 이 마당이 원래 저놈이 드나들던 밭이었잖아. 우리가 울타리를 치니까 화가 나서 항의하러 들어온 게 아닐까? 사촌 동생이 웃으며 노래를 불렀다. 끼토산 야끼토 를디어 냐느가. 충깡충깡 서면뛰 를디어 냐느가.

산토끼는 원래 들어왔던 빈 구멍을 찾아 유유히 마당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 구멍을 철망으로 단단히 막았다. 그렇게 구멍을 틀어막는 순간, 산토끼가 우리 마당으로 들어올 가능성은 완벽하게 사라져버렸다. 산토끼를 만나기 위해서는 겨울날 깊은 산속을 하염없이 헤맬 도리밖에 없다.

울타리를 세우면서 우리는 외부의 침입을 차단했다고 안심한다. 하지만 울타리를 세우는 일은 울타리 안에 갇히는 일과 다름없다. 그건 산토끼를 울타리 밖에 가두는 일이기도 하다. 원래 하나였던 것을 분리하고, 구분하고, 차별하면서 우리는 편을 가른다. 나는 너일 수 없는 것일까?

나보다 훨씬 넓고 넓은 숲이라는 마당에 사는 산토끼가 가끔 멀리서 나를 보면서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너 거기 갇혀 갑갑하지 않니? 붉나무가 조금씩 물들어가는 가을날, 산골짜기를 바라보며 산토끼에게 안부를 묻는다. 겨울에 먹을 나무껍질은 충분히 비축해 두었니? 가족들 모두 편안하니?
안도현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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