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영의정과 대제학

  •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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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1-03 07:54  |  수정 2023-12-12 10:35  |  발행일 2023-11-03 제13면
대기근 때 영남곡식 나눈 영의정 '정태화' 조선 제일 대제학 대구 인재 '서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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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영의정 관복, 금관조복이라고 하며 헌종 때 영의정 경산 정원용의 관복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조선왕조 500년 동안 영의정을 지낸 이는 160명이다. 그중 89명이 두 번 이상 역임했고 69개 가문에서 영의정이 나왔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불렀지만 권신이나 탐관은 없었으며 온화한 인물이 많았고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했다. 어린 왕이 즉위하면 원상(院相)이 되어 보필했고 나라가 어려울 때는 국난 극복에 앞장섰다. 허약한 군주아래 500년 왕업을 유지한 것은 훌륭한 영의정이 많았기 때문이다.

학문의 나라 조선에서 글에 관한 으뜸 관리는 대제학이다. 나라의 학문을 바르게 평가하는 저울이라고 문형(文衡)이라 불렀고 문장을 관장한다고 주문지인(主文之人)이라 했다. 구한말에 만든 문형록에 따르면 왕조 500년 동안 대제학을 지낸 인물은 188명이고 그중 37명이 두 번 이상 역임했다. 조선초기에는 종신직이었다가 중기 이후에는 점차 판서나 정승으로 자리를 옮기든지 겸직하기도 했다. 대제학을 배출한 가문에서는 대제학 하나가 정승 셋보다 낫다며 대제학을 추켜세우고 학문과 문장이 빼어난 집안임을 자랑하기도 했다.

최장기 영의정 황희, 최연소 한음 이덕형
조선왕조 전시기 훌륭한 인물…국운 길어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전면에 나서 큰 공
일생 청렴하게 살면서 당파싸움은 치열
대학자 많은 영남, 사후 영의정 증직 많아


◆조선의 영의정

영의정은 조선 초 의정부가 만들어지면서 생겼다. 고려 시대에는 문하시중, 구한말에는 총리대신으로 불렀다. 대부분 명문가 출신이지만 한미한 가문에서 등과하여 본인의 능력으로 영의정에 오른 인물도 많다. 가장 오랫동안 영의정을 지낸 인물은 세종 때 방촌 황희로 18년간 역임했고 가장 젊은 나이 영의정은 선조 때 42세에 오른 한음 이덕형이다. 합천의 내암 정인홍은 광해군 때 82세 나이로 영의정에 올랐다. 5번 이상 영의정을 맡은 인물은 이원익 정태화 최석정 김상복 등이고 부자 영의정, 조손 영의정이 나왔다. 왕조 전 시기에 걸쳐 훌륭한 영의정이 배출됐으니 조선의 국운은 끈질기게 길었다.

태평성대의 영의정은 큰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나라가 어려울 때는 역사 전면에 섰다. 중종반정 후 혼란기를 극복한 문익공 정광필, 임진란의 명재상 류성룡, 임진란 복구에 진력을 다한 이항복과 이덕형, 병자호란의 굴욕을 참고 나라 기틀은 지킨 최명길, 대동법의 재상 김육, 조선백성 백만여 명을 아사시킨 재난, 경신대기근에 조선을 살리는데 앞장선 정태화, 을병대기근에 청의 구휼미를 받아내 백성을 먹여 살린 최석정, 그리고 영·정조 시대에 국왕을 잘 보필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김재로 김상복 채제공 등은 당대의 명재상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왕조에서 문과급제자를 낸 750여 씨족 가운데 영의정을 배출한 씨족은 10%가 조금 못 되는 69개 씨족이다. 그중 2명 이상의 영의정을 배출한 가문은 31개, 3명 이상을 배출한 가문이 21개이다. 이는 왕조 후반기 300년 동안 노론이 장기 집권했기 때문이지만 그 속에서 최상의 인물이 영의정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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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수 정승 황희를 모신 상주 모동의 옥동서원, 대원군 서원철폐에도 훼철되지 않았다. <상주시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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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외서면에 자리한 영남인의 마지막 대제학 우복 정경세의 고택인 우복종택. <상주시청 제공>

◆청렴한 영의정

조선왕조 160명의 영의정에 대하여 후세 사가들이 권신이나 탐관으로 폄훼한 인물은 없었고, 대신 청렴한 영의정이 왕조 전 시기에 걸쳐 나왔다. 청렴은 국초 이래 중요한 덕목이므로 청백리에 녹선되거나 실록에 청렴하다고 기록된 영의정은 많다. 조선 초기 황희 구치관 정창손 김전 상진 이준경 등이 그러하며, 중기에는 홍섬 박순 류성룡 이원익 이항복 이홍주 이시백 홍명하 등이 있고 후기에는 정호 김재로 서지수 김상복 심환지 정원용 등이 있다. 사관들은 실록에 이들의 졸기(卒記, 죽음알림기록)를 쓰면서 일국의 영상이었지만 청렴 검소하게 살았다고 기록하여 후세에 전했다. 일생을 청백하게 살면서 당론에 대해서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기에 당파싸움은 그렇게 치열했다.

◆대기근 극복에 앞장선 영의정

조선은 두 번의 대기근을 겪었다. 1670~1671년 현종 때 경신대기근과 1695년부터 시작된 숙종 연간의 을병대기근이다. 17세기 지구 소빙하기가 조선을 덮쳐 나라 전체가 극심한 흉작으로 백만여 명의 아사자가 생겼다. 백성들은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연명했고 굶어 죽은 사체가 길거리에 즐비했다. 현종은 "아, 허물은 나에게 있는데 어째서 재앙은 백성들에게 내린단 말인가"하며 통곡했다. 경신대기근 때 영의정은 정태화였다. 비축미와 군량을 동원하여 영남 곡식을 관북으로 보내고 황해도 세미로 호서를 구휼하는 등 굶어 죽는 백성이 없도록 진력을 다했다.

연이어 닥친 을병대기근에는 구휼할 비축미마저 없으니 더욱 참혹했다. 기근은 장기간 계속됐다. 이때 영의정은 남구만 유성운 서문중 최석정으로 모두 소론계열의 합리적인 재상이었다. 이들은 나라에 양곡이 없으니 청나라에 도움을 청하기로 했고 최석정이 주청사로 갔다. 1697년 청나라 강희제는 구휼미 5만석을 배에 실어 보냈다. 명분과 의리에 매몰된 노론 선비들은 굶어 죽을지언정 호미(胡米, 오랑캐쌀)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 해는 병자호란의 삼전도 굴욕이 있은 지 한 갑자 되는 해였고, 강희제는 인조에게 구고두례를 시킨 청 태종(홍타이지)의 손자였다. 송강 정철의 현손으로 훗날 영의정에 오른 정호는 무엇보다 춘추대의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맹비난했고 대간들은 최석정을 파직시켰다. 하지만 백성들은 기근에서 점차 벗어났고 나라는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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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의 필적, 보물 문화재. <경기도박물관 소장>

◆증직(추증) 영의정

생전에 대학자이거나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인물에 대해 사후에 영의정으로 증직(贈職)했는데 증직일지라도 영의정은 무척 귀하다. 임진란에 나라를 구한 이순신, 진주성 싸움에 순절한 김시민, 행주대첩의 권율은 무반으로 증직 영의정이다.

대학자로 영의정에 추증(追贈)된 인물은 문묘에 배향된 동국18현이 중심인데 조광조 이언적 이황 이이 김집 김장생 송시열 송준길 김인후와 척화파 김상헌,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가 증직 영의정이다. 대학자가 많이 나온 영남에서는 실직(實職) 영의정보다 증직 영의정이 더 많다. 사림의 종조 점필재 김종직을 비롯하여 남명 조식,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귀암 이원정이 증직 영의정이고 동방5현인 한훤당 김굉필과 일두 정여창은 증직 우의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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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근정전 앞 품계석. 영의정은 정1품, 대제학은 정2품, 4품까지 품계석이 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의 대제학

대제학은 학문과 문장을 다루는 으뜸 인물이다. 홍문관과 예문관, 세종 때 집현전, 정조 때 규장각의 수장 벼슬이다. 대제학 아래 제학·부제학·직제학이 있으며 대제학은 판서와 같은 정2품, 제학은 종2품, 부제학과 직제학은 같은 정3품이지만 부제학은 당상관, 직제학은 당하관이다.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하면 양관대제학이라 했고 이를 문형(文衡)이라 불렀다. 나라 글을 지었고 과거시험을 관장했다. 대제학을 뽑을 때 전임 대제학과 정승·판서가 의망에 든 인물을 권점(圈點, 둥근점표시)하여 많이 나온 인물로 선임했는데 이를 대제학권점 또는 문형회권이라 했다. 삼공육경이 다수결로 뽑을 만큼 문형은 중요한 자리였다.

조선 초에는 본인이 사임하지 않는 한 종신직이었다. 태종 때 변계량은 20년, 성종 때 서거정은 23년을 대제학으로 지냈다. 가장 젊은 나이에 대제학에 오른 이는 선조 때 한음 이덕형으로 31세였다. 영남 인물로는 류성룡의 제자, 상주의 우복 정경세가 인조 때 마지막으로 대제학을 지냈다.

◆조선 제일의 대제학 서거정

조선 제일의 대제학은 서거정이다. 세종부터 성종까지 45년간 여섯 임금을 모시면서 15세기 문장을 평정하고 문병(文柄)을 장악했다. 왕명으로 수많은 저술을 주도해 나라 기틀을 세웠고 23번이나 과거시험을 관장했다. 경국대전,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오행총괄 등 불후의 사서를 주도적으로 편찬했고 동인시화, 필원잡기, 사가집 등 개인문집과 1만여 편의 시를 남겼다.

한문학에 대해서도 중국과 다른 우리나라의 독자성과 우수성을 내세웠고 우리 영토와 역사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표출했다. 권근, 변계량, 서거정으로 이어지는 조선 초 관각(館閣) 대제학의 중심인물이었다. 훗날 사림들이 그를 훈구파 또는 관학 인물로 평가했지만 그의 글은 장중하고 조리가 분명하며 역사성을 가지고 나라 성대함을 문장으로 나타냈다. 대구가 향리인 그는 달구벌 절승을 노래한 대구십영과 신라 천년의 고적을 읊은 경주십이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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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성리학과 대제학

조선 후기 노론이 장기 집권하자 대제학도 자연히 노론 학맥에서 나왔고 대제학을 마치고 정승과 판서로 자리를 옮기는 이가 많았다. 조선 중기 4대 문장가라 부르는 월사 이정구, 상촌 신흠, 계곡 장유, 택당 이식은 모두 대제학을 지냈고 한 집안에서 대를 이어 대제학이 나오기도 했다. 그중 월사 이정구, 사계 김장생, 백강 이경여, 약봉 서성의 후손에서 많이 나와 연리광김이란 말이 회자됐다. 여러 번 역임한 인물로는 효종 때 이식, 영조 때 이덕수, 김양택 등이 있고 조선의 문예 부흥기 정조시대 대제학으로 홍양호, 이만수가 돋보인다. 홍양호는 경주부윤 재임 시 족적을 남겼고 이만수는 안동 도산별시의 시험관이다.

하지만 성리학을 맹종하고 소중화에 매몰된 조선 후기 학문적 경향에 대제학은 깊숙이 편승했다. 문형이 어떠한 자리냐고 수많은 조선선비들이 염원했지만 임진란 이후 대제학이 편찬한 뛰어난 저작물을 찾기 어렵다. 동의보감, 목민심서, 성호사설, 동사강목, 열하일기, 연려실기술 등 훌륭한 저술은 모두 비주류 인물들이 지었고 대제학은 국왕 행장이나 왕실 제문을 짓거나 사대 외교문서에 관여했다.

역사는 거울이다. 글의 나라 조선에서 학문숭상과 모화사상이라는 상반된 공과(功過)의 학문적 흐름에 공은 오늘의 기반이 됐고 과는 시대의 몽매라고 우리에게 그렇게 나아갈 길을 알려주고 있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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