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부산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 임랑해변과 청암 박태준기념관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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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1-10 08:09  |  수정 2023-12-12 10:54  |  발행일 2023-11-10 제15면
둥그런 문 속 펼쳐진 '수정원'…얕은 물 가득히 하늘·나무·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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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 박태준 기념관의 수정원 입구 옆 곰솔은 200년 정도 된 당산나무로 제당은 마을 제당과 합치고 나무는 남겨 두었다.

해변의 사람들 모두 맨발이다. 맨발로 모래밭을 거닐고, 맨발로 먼 바다를 바라보고, 낮은 파도가 발등을 쓰다듬도록 내버려 둔다. 임자 모를 신발들이 여기저기 가지런하다. 지난밤 누군가 불을 피우려 했던 모양이다. 어디선가 가져온 강돌들이 둥근 열을 짓다만 채 버려져 있다. 누군가는 불꽃놀이를 하였는지 다 태우고 남은 쓰레기가 여기저기 누워 있다. 집들은 해변과 나란히 늘어서 있고 흰빛의 낮은 담벼락에는 낙서 같은 그림들과 민박, 파라솔, 샤워장 완비 따위가 적혀 있다. 문득, 이 해변이 저이의 것 같고 또 저--이의 것 같고 하마 내 것 같기도 하다. 문 앞이 모래밭인 집에서 평생 맨발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기장 제8경' 임랑천의 낮 천렵·밤 선유
물고기등대 너머 '왜성 성곽터'도 발견

고향에 지어진 철강왕 박태준 기념관
원래 제당 있던 자리 당산나무는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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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가 넘는 백사장은 임랑천이 안고 온 토사에 의해 이루어진 사빈이라 한다. 폭은 좁다. 임랑항 물고기 등대 너머로 보이는 것은 고리원전이다.

◆ 임랑해변

임랑(林浪). 아름다운 송림의 '수풀 림(林)'과 달빛에 반짝이는 은빛 파랑의 '물결 랑(浪)'자를 따서 임랑이라 했다 한다. 옛 이름은 임을랑(林乙浪)이다. '적을 방어하기 위한 주된 성책이 있는 갯가'라는 뜻인데, 옛날 이 일대가 군영촌이었고 임랑에 주진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해안 남쪽 끝에 숲이 보인다. 그 아래로 임랑천(좌광천)이 흘러 바다가 된다.

옛날에는 낮에 임랑천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밤에는 임랑 바다 송림 위로 달뜨는 모습을 보며 사랑하는 이와 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그 모습이 기장8경 중 제8경이다. '도화수(桃花水) 뛰는 궐어(쏘가리) 임랑천에 천렵(川獵)하고, 동산 위에 달이 떴으니 월호(月湖)에 선유(船遊)한다.' 임랑, 임을랑, 자꾸만 부르게 된다. 임랑이라 부르면 마음을 꼭 닫고 애를 끊어내는 느낌이 든다. 임을랑이라 부르면 마음이 조금 열리는 듯하다.

백사장은 1㎞가 넘는다. 임랑천이 안고 온 토사에 의해 이루어진 사빈이라 한다. 폭은 좁다. 큰 바람이 불면, 바닷가 집들은 파도에도 모래에도 속수무책일 듯하다. 그래서 담은 높직하고 문은 작은 것인지도 모른다. 비워진 듯 보이는 집도 있다. 어쩐지 세트장 같다고 느껴졌는데 골목 안쪽에서 무언가 촬영 중이다. 검은 티셔츠를 맞춰 입은 스태프들의 얼굴이 어부처럼 거뭇하다.

임랑해변봉사실 뒤편에 예사롭지 않은 모습의 소나무가 있다. 두 그루의 커다란 당산나무다. 한 그루는 200년, 또 한 그루는 500년으로 보호수다. 그 곁에 작은 당집이 있다. 무속인들이 종종 찾는 기도처라는데 주변을 마치 공원처럼 꾸며 놓아 저어한 마음은 들지 않는다. 카페도 더러 있다. '꽃밭에서'라는 카페가 정훈희, 김태화 부부가 운영하는 라이브카페라 한다. 멀리 임랑항에 펄쩍 뛰어오른 물고기가 보인다. 물고기 등대다. 황금 낚싯대로 대어를 낚는 기쁨을 표현한 것으로 풍어를 소망하는 어민들의 마음을 담았다 한다.

물고기 등대 너머로 보이는 것은 고리원전이다. 2001년 고리원전 주민들의 이주를 위해 임랑의 예정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왜성의 성곽 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발굴 결과 왜성은 임랑리 마을 뒤편 해발 70m 정도의 비교적 높은 구릉에 본성을 쌓고, 임랑천 쪽으로 돌출한 해발 24m 정도의 낮은 구릉과 평지에 외성을 두른 형태였다고 한다. 하천과 바다를 끼고 산지 공간과 평지 공간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구축한 왜군의 해안 기지였다. 기장 장안읍에는 죽성리와 임랑포 두 곳에 왜성이 있었는데 이곳에 주둔했던 왜군 장수는 조선의 사기장과 도공들을 숱하게 붙잡아갔다고 한다. 그들은 사기장과 도공들을 자신의 고향으로 강제로 끌고 가 평생 도자기를 구우며 살도록 했다. 이러한 내용은 그들 영주집안의 문서로 확인된 것이다. 10여 년 전 임랑포 해변에서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의 깨진 조각이 발견되었다. 수습된 것만 200여 점이라 한다. 약탈해가던 자 혹은 끌려가던 이들이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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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집 곁에는 수령 200년과 500년인 두 그루의 당산나무가 서 있다. 원래 할매 할배 당집이 나뉘어 있었는데 박태준 기념관이 들어서면서 하나로 합쳤다.

◆ 청암 박태준기념관

임랑천 옆, 바다가 보이는 골목 안쪽에 잔잔한 파도 같은 연하늘색 알루미늄 벽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서 있다. 그 파랑 앞 붉게 산화된 철판에 '청암 박태준 기념관'이라 쓰여 있다. 1968년 4월1일 포항제철주식회사(현 포스코)를 출범시킨 후 1992년 10월 연산 2천100만t을 달성하면서 회장직에서 사임할 때까지 25년간 한국 철강 산업을 이끌었던 철강왕 박태준(朴泰俊). 그의 고향이 임랑이다.

박태준은 1927년 음력 9월29일 이곳에서 태어나 6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1933년 9월 가족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성장기를 거친 후 1945년에 와세다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그때쯤 우리는 독립을 맞이했다. 박태준은 학업을 중단하고 고국으로 돌아왔고 1948년에 육군사관학교 6기 생도로 입학하게 된다. 그와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여기서 처음 시작됐다. 청암(靑巖)은 호암 이병철 삼성 회장이 고인에게 준 아호다. 호암은 일본 와세다 대학교 동문으로 17살이나 아래인 청암을 '살아 있는 경영 교재'라며 아꼈다고 한다. 청암은 2011년에 세상을 떠났고 기념관은 2021년에 개관했다. 유족이 기증한 생가 주변 부지에 지은 아담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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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기념관의 전시실은 소박하다. 청암의 얼굴 조각상과 평소 그가 사용하던 작업복과 지시봉, 구두 등이 전시되어 있다. 커다란 창으로 수정원이 내다보인다.

입구에 들어서자 안내 데스크의 직원이 활짝 웃으며 맞아준다. 그녀의 안내에 따라 회랑을 걷는다. 휘어진 높고 좁은 길이 점점 밝아오며 둥그런 문이 열린다. 문 속은 '수정원'이라 불리는 중정이다. 얕은 물이 펼쳐진다. 입구 바로 옆에는 곰솔 두 그루가 우람하다. 200년 정도 된 것으로 당산나무라 한다. 원래 이곳에 제당이 있었는데 기념관을 지으면서 마을 제당과 합치고 나무는 남겨 두었다. 맞은편에는 잘생긴 개잎갈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생전에 청암이 아꼈던 나무로 이 나무 아래에 테이블을 놓고 차를 마시며 독서를 즐겼다고 한다. 곰솔과 마찬가지로 원래 자리 그대로라 한다. 두 그루 나무를 그대로 두고 설계한 것이다. 설계는 건축가 조병수가 했다. 그의 작품은 작을수록 비오는 날 흙내가 나는듯한데 이곳도 그렇다. 물속에 하늘이 있고 나무가 있고 또 전시실이 비친다.

전시실은 소박하다. 청암의 얼굴 조각상과 평소 그가 사용하던 작업복과 지시봉, 구두 등이 전시되어 있다. 수정원을 내다보는 창 앞에 돌덩어리가 놓여 있다. 앉아도 된다는 메시지가 있어 씩 웃음이 난다. 왼쪽으로 곰솔을 보고, 오른쪽으로 개잎갈나무를 보고, 맞은편으로 회랑을 걷는 사람들의 종아리를 본다.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다. 실패하면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빠져 죽자.' 유명한 말이고 잊히지 않는 말이다. 기념관 문 앞에서 좌향좌하면 바다다. '푸짐한 것은 가난과 파도소리뿐'이라 했던가. 지금 파도소리는 들리지 않고 머릿속에서 임을랑 부르는 소리만 잔뜩 난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

55번 대구부산고속도로 부산방향으로 가다 대감 분기점에서 600번 부산외곽순환고속도로를 타고 기장방향으로 간다. 기장IC에서 내려 31번 국도를 타고 기장, 일광 방향으로 직진한다. 임랑교차로에서 빠져나가 좌회전,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가면 임랑해변이다. 박태준기념관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며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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