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경남 김해 진영읍 진영역 철도박물관, 105년간 달려간 철길, 그 가던 길을 멈추고 산책길·쉼터가 되다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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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2-01 08:20  |  수정 2023-12-11 15:50  |  발행일 2023-12-01 제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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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역은 기차가 달린 지 105년 만인 2010년에 폐역되었고 지금은 철도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기찻길을 아이가 달린다. 두 발에 조그만 날개를 단 것처럼 달린다. 기찻길 옆 벤치에 앉은 엄마는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걱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조심하라는 다정한 말뿐, 가벼운 감미로움이 퍼진다. 귀를 쫑긋 세우고 서로의 얼굴을 살피며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던 노인들은 잠시 아이를 바라보며 소리 없이 웃는다. 기찻길에 기차가 서 있다. 달리기를 멈춘 기차는 이제 이들과 함께 이곳에 서 있기로 했다. 기차의 둥그런 창으로부터 커피 향이 흘러나온다. 김해에 자리한 옛 진영역 이야기다.

1905년 5월, 군수품 나르는 군용철도 개통
객차 통로 담배연기·삶은 달걀·오징어·맥주
오래된 기찻간 기억들로 가득 채운 박물관
역사 앞 광장 그려진 전국적 명성 진영단감
퇴역 기관차 체험·성냥전시관도 재미 쏠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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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로에는 퇴역한 새마을호 7115호 기관차와 객차 두 량이 멈춰서 있다. 기관실에 들어가 볼 수 있으며 객차는 지역 청년들이 운영하는 카페로 쓰이고 있다.
◆진영역 철도박물관

진영에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 것은 1905년 5월부터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그때, 일본은 군수품을 나르기 위한 군용철도로 마산항과 삼랑진을 잇는 마산선을 건설했다. 경인선, 경부선에 이은 세 번째 개통 철도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지선철도였다. 이 노선은 원래 조선인 사업가 박기종이 철도부설 허가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일제는 자금을 미끼로 사업권을 빼앗았고 일방적으로 그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군용철도를 놓았다. 1907년에는 보통역이 되었다. 그리고 일제의 강점이 시작되자 조선총독부 철도국으로 업무가 이관되고 진영역에는 일본인 역장이 배치됐다. 지금의 역사는 1943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기차가 달린 지 105년만인 2010년, 진영역은 경전선 복선전철화로 폐역되었다. 진영역은 새로운 위치로 이전되어 KTX 일부 열차가 정차하게 되었고 옛 진영역은 지금 철도박물관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개표 가위를 든 역무원이 서 있다. 포토존이다. 표를 손에 꼭 쥐고도 검표의 순간은 왜 그리 두근거렸는지. 오래되었지만 생생한 기억들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이를테면 객차 통로에 자욱했던 담배연기와 삶은 달걀 냄새 같은 것, 저만치 군것질거리를 가득 채운 손수레가 나타나면 모가지가 빠지도록 들썩거렸던 기억, 맥주와 오징어, 단지우유 그리고 주황색 그물망에 담겨 있던 주황색 귤 같은 것. 어느 날 그 손수레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그 충격과 배신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대합실 벤치에는 단감 바구니를 앞에 둔 여인과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앉아 있다. 역시 포토존이다. 언젠가 보자기에 싸인 닭이 머리를 내놓고 두리번거리던 것을 본 적 있다. 아, 이 기억은 너무 옛날 사람 같으니 드라마에서 본 것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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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청년미술인 단체인 '레트로봉황'의 '레트로 진영'이라는 작품. 진영의 역사와 상징성, 추억 등을 매개로 과거와 미래를 따뜻하게 이어주는 모습이다.
내부는 소박하지만 볼거리가 꽤 많다. 대한제국 시절 순종황제의 기차 순행과 분단되기 전 하얼빈과 목단강을 거쳐 유라시아 대륙까지 연결됐던 기찻길, 1·4후퇴 당시 서울역을 떠나는 피란열차 등 한국철도사의 주요 장면들을 본다. 진영역이 속한 마산선의 역사를 읽고 추억의 증기기관차 모형이 내지르는 소리도 듣고, 예전 객차의 모습도 들여다보고, 실제 무궁화호에서 촬영한 영상을 바탕으로 제작된 기관사 체험도 진중하게 해 본다. 시민들에게 기증받은 철도 관련 물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빳빳한 종이로 만들어진 에드몬슨식 승차권과 지금은 사라진 비둘기호 승차권, 철도경찰 유니폼과 월급봉투, 화물 운송장과 수화물표 등은 오래전 누군가의 삶이다. 제2전시관에는 옛 진영역 풍경을 실감 나게 재현한 디오라마가 있다는데 오늘은 내부 사정으로 출입 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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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사 체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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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냥전시관에는 옛날 성냥공장에서 사용했던 더께 앉은 물건들을 볼 수 있다. 곤로에 불을 붙이는 엄마의 모형.
◆기억을 이어가는 모두의 공원

역사 앞 광장에 단감이 그려져 있다. 사방치기 놀이판과 물고기 노는 연못도 있다. 벽에서는 기차가 달려 나온다. 구시가 도로로 이어지는 계단에는 진영역과 역무원, 단감바구니, 할머니와 아이들 등이 그려져 있다. 매년 단감축제가 열릴 만큼 전국적으로 이름이 높은 진영 단감은 진영역과 인연이 깊다. 1923년경 진영역장으로 부임한 일본인 하세가와는 본국 식물학자들의 도움을 얻어 지금의 진영읍 일대에 단감나무 100주를 시험적으로 재배했다고 한다. 진영은 기후와 산세, 토질이 단감 재배에 최적지였고, 진영단감은 열차로 중국 베이징까지 수출됐다. 벽화는 김해 청년미술인 단체인 '레트로봉황'의 '레트로 진영'이라는 작품이다. 진영의 역사와 상징성, 추억 등을 매개로 과거와 미래를 따뜻하게 이어주는 모습이다.

폐선부지는 도시 숲이 되었다. 물놀이장도 있고 놀이터도 있고 벤치와 파고라도 곳곳에 자리한다. 공원은 놀이터이고 산책로이며, 쉼터이자 동네 사랑방이다. 주말에는 플리마켓도 열린다고 한다. 벤치에 휴대폰 충전이 가능하다는 안내문이 있다. 폰을 슬쩍 놓아 본다. 폰은 드릉 몸을 떨더니 충전을 시작한다. 오, 오, 오, 감격의 단말마에 지나가던 노인이 씩 쳐다보신다. '뭐 그 정도 가지고'라는 듯한 표정이시다. 선로에는 퇴역한 새마을호 기관차와 객차 두 량이 멈춰서 있다. 새마을호 7115호. 1975년 미국 GM사에서 제작한 전기식 특대형 디젤 기관차다. 기관실도 들어가 볼 수 있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장치들이 가득하다. 이것저것 만져본다. 버튼도 눌러보고 레버도 당겨본다. 박물관에서 해 보았던 기관사 체험과는 성격이 다른 신기함이 있다. 객차는 카페다. 지역 청년들이 운영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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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역 철도박물관은 소박하지만 볼거리가 꽤 많다. 예전 객차의 모습.
카페 입구 맞은편에 성냥전시관이 있다. 진영역 근처에 김해 1호이자 우리나라의 마지막 성냥공장이었던 경남산업공사가 있었다. 1948년 진영읍에 들어선 경남산업공사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신흥'과 '기린표' 성냥을 만들던 곳이다. 한때 3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릴 만큼 번성해 주민 대다수가 이 공장 덕분에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다 1980년대 일회용 가스라이터가 보급되면서 성냥산업은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2017년 경남산업공사는 결국 가동을 멈췄다. 이곳 전시관에는 당시 성냥공장에서 사용하던 기계와 관련 물품, 실물현판 등을 모아뒀다. 곤로에 불을 붙이는 엄마, 다방에 앉아 성냥을 쌓는 언니오빠들의 모형도 있다. 세월이 참. 커피를 기다리며 창밖을 본다. 자전거 탄 사람이 지나간다. 계란빵과 커피콩빵을 우물우물 번갈아 씹으며 창밖을 본다. 젊은 부부가 쪼그만 강아지에게 이끌려 금세 멀어진다. 뒤안에 곤로를 놓고 도넛을 튀기던 옛 기억이 난다. 그 많던 성냥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세월이 참.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

55번 대구부산고속도로 남밀양IC에서 내려 25번국도를 타고 진영, 수산 방향으로 간다. 공설운동장교차로에서 부산, 진영, 진영역(고속철도) 방면으로 나가 약 900m 정도 전방 타이어뱅크 건물 앞에서 우회전해 들어가면 왼편으로 진영역철도박물관 일대가 보인다. 동대구역에서 KTX를 타면 새로운 진영역까지 51분 걸린다. 진영역에서 140번 버스를 타고 17분이면 철도박물관 앞이다. 진영역 철도박물관과 성냥전시관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하며 입장료는 무료, 매주 월요일과 공휴일에 휴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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