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산책] 해럴드 핀터 '축하파티'…예술가와 시민으로서 추구하는 정치적 비전과 진실

  • 정문영 (계명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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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2-29 08:54  |  수정 2023-12-29 09:00  |  발행일 2023-12-29 제25면
2000년 초연된 그의 마지막 작품
직설적 풍자 방식으로
런던 최고급 레스토랑
파티 이면 '폭력' 다룬
작가 특유의 '핀터레스크' 정치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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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영 계명대 명예교수가 번역한 해럴드 핀터의 책. <필자 제공>


끔찍한 곤경에 처해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으로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주된 의무는 우리의 삶과 사회의 '진정한'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굽힐 줄 모르는 확고하고도 맹렬한 지적 결단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강제적인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결단을 우리의 정치적 비전으로 구현하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가 거의 놓쳐 버린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는 희망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예술, 진실 그리고 정치성: 노벨상 수상 연설', 2005)

◆핀터의 부조리성과 정치성

2005년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극작가 해럴드 핀터(1930~2008)는 1950년대 말에 등단해 반세기 계에 걸쳐 29편의 극작품뿐 아니라 27편의 영화 대본, 그리고 시와 소설, TV와 라디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핀터레스크'라는 형용사가 옥스퍼드 사전에 수록될 정도로 독특한 핀터랜드의 지형도를 그려낸 그의 극작품은 20세기 새로운 현대 연극의 전통 생성에 주요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등단과 동시에 핀터는 사무엘 베케트를 선구자로 한 부조리극 전통을 확립한 마틴 에슬린에 의해 부조리극작가로 분류됐다. 에슬린의 부조리극 비평은 예술과 정치를 분리하는 이분법적인 냉전 시대 미학을 반영한 것으로, 현대 드라마의 전통을 부조리극과 정치극으로 양분해 파악하는 입지를 취한다. 따라서 현대 연극 비평의 정전 역할을 자처한 에슬린이 주도한 부조리극 비평은 핀터와 그의 극작품을 정치적 관심이 전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핀터의 정치성을 배제하거나 부조리성으로 대체하는 읽기를 해왔다. 이러한 읽기는 '핀터레스크'를 탈정치적인 부조리극작가의 작품의 특성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핀터는 1980년대 중반과 2000년대 중반, 두 번에 걸친 극작 중단 선언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관심과 극작품의 정치성을 명확하게 밝혔다. 첫 번째는 정치극에 전념하기 위해 이제 정치성이 분명하게 부각되지 않은 기억극을 쓰지 않겠다는 공언, 두 번째는 한 시민으로서 정치적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더 이상 극작을 하지 않겠다는 결단 표명이었다. 1980년대 중반 선언 이후 본격화된 그의 부조리성과 정치성에 대한 열띤 논의는 정치적 은유라고 할 수 있는 초기 '위협희극'까지 소급하여 그의 작품은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늘 정치적"이었다는 결론으로 수렴됐다. 2005년 극작 중단 선언 이후 그의 노벨상 수상과 연설 '예술, 진실 그리고 정치성'은 예술가와 시민으로서 그의 정치적 비전과 추구해온 진실을 통해 그의 극작품의 세계, 핀터랜드를 구축해온 정치성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런던 이스트엔드에 정착한 유대계 이민 2세로 핀터가 겪은 제2차 세계대전 경험과 해크니에서의 성장과정은, 그의 극작가로의 수업 시대인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자전적 소설과 극으로 각색한 '난쟁이들'(1952∼1956/1990)에서 냉소적인 마크 길버트처럼, 그를 "본능적 아웃사이더"로 어떤 체제도 지지하지 않겠다는 '반대자'로서의 그의 성향을 형성하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 그가 보고 경험한 전후 체제적 권력이 초래한 "인간에 대한 인간의 비인간성의 이미지들과 공포"와 이러한 체제적 억압에 대한 거부와 저항 의식이 그의 삶과 연극의 무대를 전개하는데 근간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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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국제핀터학회(런던)가 마련한 70세 생일파티의 주인공 핀터의 '축하파티' 낭독 후 리셉션에서 해럴드 핀터(왼쪽)와 필자. <필자 제공>

◆21세기 파국의 시대의 '축하 파티'

핀터의 대표작으로는 그의 첫 성공작 '생일 파티'(1957)를 들 수 있지만, 가장 활발했던 극작 시기는 '옛 시절'(1971), '배신'(1978) 등과 같은 기억극을 쓰던 시기였다. 그러나 본인은 '방' 안에 갇혀 '몽유' 상태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고 평가한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마지막 한 잔'(1986), '산악 언어'(1988) 등과 같은 '명백한 정치극'을, 그리고 정작 본인은 정치성을 주장하지만, '기억극으로의 귀환'으로 평가되기도 한 '축하 파티'(2000)를 마지막으로 한 일련의 후기 정치극을 쓴 뒤 극작 활동을 중단했다.

핀터의 마지막 작품이자 그 특유의(핀터레스크) 정치극이라고 할 수 있는 '축하파티'는 2000년 초연부터 통상 첫 작품인 '방'(1957)과 함께 공연되고 있다. 43년의 시간 간격을 두고 쓴 두 작품의 동시 공연은 두 작품의 상호텍스트적인 읽기를 유도한다. 1950년대 그리고 21세기가 막 시작되는 시점의 런던을 각각 배경으로 해, 핀터도 지적했듯이, 두 작품 모두 '폭력'을 주제로 다룬다. 각각 다른 시기에, 다른 극작 방식으로 동일한 주제를 다룬 첫 그리고 마지막 작품을 동일한 무대에 올리는 것은 '핀터랜드'의 지형도를 조망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지배와 종속의 게임'을 다루는 위협희극으로 분류되는 첫 작품 '방'은 정치적 은유의 우회적인 방법으로 폭력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면, '축하 파티'는 직설적인 풍자의 방식으로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노벨상 수상 연설을 비롯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핀터는 우리가 인간의 존엄성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긴박한 파국적 현실을 맞이하고 있음을 역설했다. 권력 유지에만 관심이 있는 정치가들의 담론이 만들어낸 "거짓말의 거대한 태피스트리"에 둘러싸여, 우리의 생각은 마비가 되고 그 이면에 있는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예술가는 더 이상 모호한 은유적 의미들을 만들어내는 거울 비추기 놀이로 진실을 추구할 수 없게 되었고, 이에 극작가로서 그는 거울을 깨뜨릴 때가, 즉 극작을 중단할 때가 되었음을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선언에 앞서 그가 마지막으로 쓴 작품이 바로 '축하 파티'이다.

'축하 파티'의 무대인 런던의 최고급 레스토랑은 정치적 언어로 평등주의를 위장하고 있지만 엄격한 위계질서의 계급 피라미드 구조의 자본주의 시스템의 축소판이자, 탐욕과 형편없이 추락한 지성의 수준이 지배하는 사회로 전락해버린 "대처 집권 이후 영국의 소우주"를 보여준다. 저속한 물질주의적 포스트모던 문화의 찬양과 존속을 위한 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레스토랑은 돈과 권력의 위력으로 특권 계급이 된 천박한 포스트모던 인간들을 위해 격조 높은 최상의 서비스로 럭셔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파티를 제공한다. 그러나 '생일 파티'를 비롯하여 다른 후기 정치극 '파티 타임'(1991), '달빛'(1993)의 파티처럼 이 파티 또한 그 이면에 숨어 있는 폭력적이며 야만적인 파국의 현실을 드러내 보이는 의식으로 전용되고 있다.

'축하 파티'에 등장하는 '젊은 웨이터'는 젊은 시절 웨이터로 일하다 해고를 당한 경험이 있는 핀터를 연상시킨다. 젊은 웨이터는 그 레스토랑이 그에겐 자궁과 같은 곳으로 거기에서 나와 탄생을 하는 것보다 머물고 싶다고 고백한다. '생일 파티'의 스탠리처럼, 그는 '방' 밖 '실재의 사막'으로 나가는 것보다 '매트릭스' 속에 머물기를 선호한다. 그러나 그는 레스토랑에서 준수해야 할 엄격한 원칙을 어기고 세 번이나 파시스트적인 웅변을 늘어놓는 천박하고 무식한 포스트모던 인간들의 대화에 품위와 전통을 상징하는 모더니스트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끼어드는 "부적절한" 개입을 감행했다. 그들의 대화에 한 번 더 끼어들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그의 마지막 독백은 그에게 세계를 내다 볼 수 있는 망원경을 사준 할아버지를 따라 "거짓의 태피스트리"를 벗어나는 결단에 이르게 된 핀터의 혼란스러운 심정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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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영 (계명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정문영은 계명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대영미드라마학회장, 계명대 인문과학연구소장, 여성학연구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정문영의 시네마크리티크'를 연재하고 있다. 2002년부터 열린대학 솔N이락의 공동대표로 시민인문학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

서울대와 미국 델라웨어대에서 현대드라마와 비평이론을 전공했고, 해럴드 핀터를 비롯하여 주요 현대드라마작가들, 소설, 연극, 영화의 상호매체성, 각색연구, 한류연구 분야에서 다양한 주제들에 관한 연구와 강의로 활발한 저술과 학술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Pinter at Sixty'(Indiana University Press, 공저), '현대비평이론과 연극'(동인), '해럴드 핀터의 정치성과 성정치성'(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해럴드 핀터의 영화 정치성'(동인) 등외 다수, 논문으로는 'Hallyu and Film Adaptation: Maids of Decolonization in Park Chan-wook's The Handmaiden'(Korea Journal), 'Stage as Hyperspace: Theatricality of Stoppard' (Modern Drama)를 비롯하여 다수가 있다.

공동기획 :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HK+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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