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의 영화의 심장소리] '과거가 없는 남자'(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 2002 · 핀란드 외)···반짝이는 사랑과 연대의 힘

  • 김은경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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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1-05 08:03  |  수정 2024-01-05 08:04  |  발행일 2024-01-05 제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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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영화 칼럼니스트)

'사랑은 낙엽을 타고'(2023)를 봤다. 은퇴를 번복하고 만든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최신작이다. 옛날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좋았다. 차디찬 세상에서 기어이 사랑을 찾고, 함께 걸어가는 마지막 장면이 눈물겹다.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향한 오마주였다. 76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난민 문제를 다룬 영화 '르 아브르'(2011)를 본 이후로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쏟아지는 영화들 속에서 감독의 이름을 보고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슬기로운 영화 생활'일 것이다. 물론 영화는 취향에 따라 다르다. 사랑스러운 영화 '르 아브르'를 무척 좋아하지만, 함께 본 친구는 졸았다. '타인의 취향'을 존중한다. 취향에 따른 호불호는 각자의 몫인 거다.

감독 특유의 '데드팬(무표정한 얼굴) 코미디'와 함께 '타블로 미장센'으로 불리는 정지된 화면은 낯설음과 답답함을 동반할 수 있다. 감독이 옛날 영화, 무성영화를 워낙 좋아해서 그런 것 같다. 화면은 낡아 보이고, 인물들은 느릿하게 움직인다. 주고받는 대사들도 짧다. 이런 빈티지 느낌이 매력인데, 흘러나오는 음악들이 정말 좋다. 인물들은 '쥐뿔도 없는데' 낭만이 있다. 먹을 것이 제대로 없는데도, 버려진 주크박스를 고쳐 음악을 듣는가 하면('과거가 없는 남자'), 해고되어 돈도 없는데 함께 영화를 보러 가는('사랑은 낙엽을 타고') 식이다.

'과거가 없는 남자'는 55회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와 분위기는 비슷하나, 사랑과 함께 이웃 간의 연대를 말하고 있어 더 좋았다. 하층민의 삶을 향한 애정과 속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같으나, 이야기의 힘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과거가 없는 남자'의 주인공은 강도를 당한 뒤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다. 이름도, 연고지도 모른다. 그를 발견한 이웃과 구세군의 도움으로 조금씩 안정을 찾는다. 구세군에서 일하는 외로운 여인과 사랑에 빠지지만, 모종의 사건에 휘말려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된다. 부인을 찾고 흔적을 찾는데,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건 선의를 가진 주변 인물이었다. 쓰러진 그를 돌봐주는 가난한 부부와 온정을 베푸는 구세군 여인, 또다시 강도를 당할 지경일 때 나타나서 돕는 이웃들. 냉혹한 자본주의를 고발하면서도 연대의 힘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전작 '성냥 공장 소녀'(1990) 등과는 달리 온기가 가득하다.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그가 과거를 찾고, 이름을 되찾고 보니 좋은 사람이 아니더라는 데 있다. 기억을 잃었을 때 훨씬 더 나은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거다. "앞만 보고 가는 세상, 뒤돌아봐서 뭐하나"라며, 기억상실에 개의치 말라는 이웃의 위로가 따뜻하다. 잊을수록 좋은, 그런 과거는 잊는 게 맞다.

'먼지 속 보석처럼 반짝이는 영화'라는 감독의 영화들을 찾아보시기 바란다. 세상이 차갑고 시릴수록 온기가 더욱 그리운 법이다. 무표정하고 덤덤한 얼굴로, 차디찬 세상에서 기어이 한 줌의 온기를 찾아내는 이들을 보며, 보석처럼 반짝이는 희망을 간직하시기를.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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