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아이를 함부로 키우나 .3]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심리 DNA까지 대물림

  • 이효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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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1-03 07:50  |  수정 2024-01-03 07:53  |  발행일 2024-01-03 제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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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 1
부동산업으로 큰돈을 번 김태준(가명·42)씨는 매사 적극적이고 기민하고 사교성도 좋다. 하지만 만 3세 때 부모의 이혼으로 할머니와 쭉 살았다. '믿을 놈은 하나도 없다' '오직 자기 힘으로 살아 남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어떤 일이든 가리지 않고 돈을 벌었다. 젊은 나이에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재산을 모았다. 대신 타인으로부터 무시를 받을 때 물불을 가리지 않고 분노를 터뜨린다.

김씨에겐 10세 아들과 8세 딸이 있다. 제대로 못 배운 그는 아들만큼은 공부를 잘 시키고 싶다. 그런데 아들이 기대에 못 미칠 땐, 소리를 지르고 야단치고 화를 냈다. 어릴 땐 아들을 발가벗겨서 집 밖으로 내쫓기도 했다. 얼마 전엔 공부하지 않고 유튜브만 본다며 "너 같은 건 공부할 필요 없다"면서 아들이 아끼는 장난감들을 때려 부쉈다.

# 2
중학교 교사인 박미영(가명)씨의 엄마는 고등학교 교사였다. 박씨는 어린 시절 여러 학원을 전전해야 했고, 학원을 마치고 늦게 귀가하면 과외선생이 그를 기다리곤 했다. 늘 1등이기를 강조했던 엄마는 더 잘하기를 원했다.

몇 년 전, 박씨의 딸이 초등학교에서 쓴 글을 봤다. '엄마는 학교 선생님이신데 세련되고 똑똑하고 나에게 늘 헌신하신다. 내가 잘되기를 가장 원하시고, 가끔 내가 동생들과 싸우거나 할 때면 무섭게 혼도 내시고 때리기도 하신다'는 내용이었다. 박씨가 엄마에게 느꼈던 비슷한 감정을 딸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 박씨의 딸이 어린 동생한테 한숨을 푹 쉬면서 "이것밖에 못해. 도대체 너는 커서 뭐가 될래.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어"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어떻게 아이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는가 싶어 깜짝 놀랐다. 그 말은 박씨가 어릴 적 엄마에게 들었던 소리였다.

부모는 자신이 '내면화'된 대로 양육
자녀는 양육된 대로 답습해 '내면화'
부모 상처를 아이에게 투사하지 않고
자기 내면 치유해야 아이 심리도 건강


전문가들은 부모의 양육방식이 자녀 마음의 밑바탕을 형성한다고 입을 모은다. 부모는 자신이 '내면화'된 대로 자녀를 양육하고, 자녀는 양육된 대로 내면화한다는 것이다.

옛말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듯 자식은 부모의 특징을 빼닮는다. 생물학적인 DNA가 아니라 부모와 자녀 간 심리적 상호역동성에 의해 자식은 부모의 심리 DNA를 그대로 이어받는다. 컴퓨터로는 소프트웨어, 스마트폰으로는 앱에 비유할 수 있으며, 통상 '본을 뜬다'고 했을 때 그 본이다.

대상 관계이론 전문가들은 "사회성의 기초가 되는 양육자와의 최초 관계인 '내적대상관계'란 개념을 이해하면 부모와 자식 간의 대물림하는 심리적 상호역동성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김씨는 어릴 때부터 부모가 자신을 함부로 대했다고 했다. 아버지는 김씨를 무시했단다. 그는 자라면서 자기 존재는 무시 받아도 되는 가치 없는 사람으로 내면화된 것 같다고 했다. 대상관계이론으로 보면, 내적대상관계가 부정적으로 형성됐기 때문에 타인과 관계를 형성할 때, 특히 자식들과의 관계를 형성할 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김씨의 내면에 부모로부터의 무시감, 분노감이 안착된 결과, 자신의 아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 아들을 무시하는 방법으로 대응한 것이다. 김씨의 아들은 어린 시절 발가벗겨져 집 밖으로 쫓겨날 때 '우리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또 스마트폰을 본다며 장난감을 부수는 아버지를 보면서 엄청난 공포감과 부당함을 느꼈을 것이다. 김씨는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무시감과 분노감을 아들에게 퍼붓고, 아들은 그 느낌을 고스란히 대물림한 것이다.

김씨는 스스로 생후 36개월 동안 내면화된 심리적 원형을 탐색하고, 부모로부터 받은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

박씨의 경우 어린 시절 바쁘고 엄격한 엄마보다 따뜻하고 함께 놀아줄 엄마가 필요했다. 잘해야 한다고 스스로 채찍질하는 아이보다는 즐거움과 웃음이 넘치는 아이로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야 했다. 그렇지 못했던 박씨는 자신의 내면에 충분히 다 자라지 못했던 상처받은 또 다른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박씨에게 상처받은 내면의 아이에 대한 1차 가해자는 엄마였지만, 딸에게 이어지는 2차 가해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이 같은 정서적 대물림은 옛날식 '가풍(家風)'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긍정적인 대물림은 그대로 계승해도 좋겠지만, 김씨와 박씨의 사례처럼 부정적인 것이라면 대물림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김영호 <사>한국가족상담협회 대구가족상담센터 소장은 "아이들의 심리상태가 건강하려면 부모가 아이에게 투사하지 않고 부모의 상처받은 내면을 치유해야 하며, 부모는 부모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분리된 개인적 인격체로 살아가야 한다"며 "그렇지 않다면 부모와 자식 간에 정서적 대물림이 끊어지지 않고 문제점은 계속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 공동취재단: 영남일보 사회부 이효설기자, 행복한가족만들기연구소 이제상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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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호 대구가족상담센터 소장
"본 보이는 부모 바꿔야 자녀 마음의 병 고친다"

"양육자가 가지고 있는 심리적 '본'(本)은 피양육자인 자녀의 본으로 그대로 전승됩니다. 부모의 본은 요즘 스마트폰에 설치된 앱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앱을 한번 설치하면 없애거나 바꾸기 쉽지 않습니다."

<사>한국가족상담협회 대구가족상담센터 김영호〈사진〉 소장은 부모와 자녀 간 심리적 상호역동성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양육자는 생후 36개월 동안 자녀에게 본을 심고, 그것은 큰 틀에서 바뀌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김 소장은 "10대 청소년이 심리치료가 필요할 경우 아이들을 직접 상대하지 않고, 그 엄마부터 대상으로 치료한다"면서 "이는 본을 보이는 부모를 바꿔야 자녀들이 바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 소장은 최근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10대가 급증하고 있는 것을 우려했다. 특히 자녀들이 엄마와의 특별한 일대일 관계를 형성해야 할 시기에 그 과업을 이루지 못하면서 성격장애를 비롯해 우울증, 불안장애, 경계선 증후군 등 각종 정신질환이 발병한다고 우려했다. 그는 사회적으로 생산성과 개인의 성공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여성의 육아·가사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지 않아 발생한 결과라는 해석도 내놓았다.

김 소장은 "유아기 동안 아이들에게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다. 아이에게 엄마가 매달려 있어야 하지만, 사회에선 그걸 무시한다. 엄마는 사회적 성공을 원하고, 국가는 풍부한 여성 노동력을 활용하고자 한다"며 "이런 논리로 사회제도를 설계한 게 문제"라고 짚었다.

김 소장은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동들은 즉각적인 만족을 주는 대상과 상황에 쉽게 빠져버린다고 우려했다. 그는 "엄마와의 애착 관계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는 아이는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당장 자신의 욕구를 해결해 줄 대상을 찾아다닌다"며 "스마트폰과 게임에 쉽게 빠져 쾌락적이고 즉각 만족을 주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데 집중한다. 엄마 품에서 부드러운 맛, 행복했던 느낌이 없다면, 남에게 양보하고 배려하는 마음도 생길 수 없다"고 했다. 공동취재단

▨ 공동취재단 : 영남일보 사회부 이효설 기자, 행복한가족만들기연구소 이제상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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