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국화도·매박도·도지섬 트레킹

  • 김찬일 시인·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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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1-12 07:51  |  수정 2024-01-12 07:52  |  발행일 2024-01-12 제14면
'서해의 진주' 국화도, 썰물에 드러난 길 따라 도지섬·매박도 걸어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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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도 육계사주와 도지섬.

뭍과의 거리 3㎞ 10여분 항해로 도착
비탈진 모래와 조가비언덕·기암괴석
바다와 섬들이 그려놓은 몽환의 풍경


겨울 아침 안개가 자욱하다. 단풍과 코스모스의 아름다운 파스텔을 지우고, 가을 그 계절이 완성되기도 전에, 겨울은 안개를 앞세워 부두를 점령했다. 곧 햇살이 안개를 거두겠지만, 아직은 가시거리가 짧아 바다도, '그 섬에 가고 싶다'는 그 섬도 보이지 않았다. 승선 시간이 남아 당진 장고항 부두를 거닐어 본다. 어디서인지 파도 소리가 들린다. 바다는 얼굴을 가린 채 '내 손은 약손'이라며 아픈 배를 쓰다듬어 주시던 어릴 적 엄마의 음성을 닮은 파도 소리를 안개 속에서 들려주었다.

들국화가 지천으로 피어 국화도가 되었다는 섬은, 일명 서해의 진주, 당진의 보물섬으로, 꽃보다 보석으로 치장되어 널리 유포되었다. 들국화도 그렇지만 진주나 보물도 우리의 상상에서 더 사무치는 이름들이다. 시나브로 안개가 걷힌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어부들이 어선에 오른다. 갯내 물씬 풍기는 저 바다에 애환과 먹거리가 있다. 이어 몇 척의 어선들이 통통거리며 바다로 나간다. 어부들은 바다에서 자신들의 꿈과 삶을 그물로 건져 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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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박섬의 경이로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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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뜨고 지는 왜목마을.

부두는 정말 평화로운 풍경이다. 나는 국화훼리호에 승선한다.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안개는 어느덧 사라지고, 오전의 겨울 햇살에 눈이 부시다. 빛으로 가득 찬 눈에 비치는 바다는 창세기 말씀으로 곰비임비 출렁거린다. 뭍과 섬의 거리는 불과 3㎞, 십여 분의 항해로 섬에 닿는다. 그 섬은, 역시 꽃과 보석의 대명사였다. 섬과 꽃 그리고 보석은 나에게 있어 갈망의 하모니다. 섬을 걷는 마음에 알 수 없는 무언가로 가득 찬다. 아마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소통과 공감의 애드벌룬일 것이다. 국화도는 이전에 꽃이 늦게 피고 진다고 하여 늦을 만(晩)자를 써 만화도라 불렀다. 이전에 밥 짓기와 난방을 나무로 하던 시절, 국화도의 나무는 다 베어지고, 까까머리 섬이 되자 곳곳에 들국화가 지천으로 피었다. 이에 만화도를 국화도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우측 언덕 데크 길을 지나고 해변의 자갈길을 걸어 매박도로 간다. 물때가 맞아 매박섬으로 가는 길, 육계사주가 곡선으로 열려 있다. 아무리 걸어도 질리지 않는다. 좌우에서 밀려온 파도가 길을 내어준 모래 등에 철썩이고 있다. 매박섬은 말을 매어 놓은 형상에서 따온 이름이다.

겨울 매박도 트레킹에서 놓칠 수 없는 곳은 첫 봉우리와 두 봉우리 사이 그리고 뒤 봉우리 해변에 있는 세 개의 조가비 언덕이다. 흰 비탈진 모래 등에는 속살이 없어진 하얀 석화, 바지락, 개조개, 대수리, 고둥 껍데기 등이 온통 널려 있다. 흰 사구 같기도 하고, 눈 내린 언덕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얀 조가비 하나를 주워 볼에 대어 본다. 그때 두 볼의 붉은 발을 타고 흐르는 11월 하순의 기억. 그해 첫눈이 밤사이 소리 없이 내리고, 나는 하얀 첫눈이 슬퍼 눈을 한주먹 쥐어 볼에 대어 보았다. 눈은 나 같은 가난뱅이에게 환상을 퍼부어 드로잉을 하게 하고, 겨울의 서정적인 음악, 가슴을 후벼 파는 '눈이 나리네'를 코러스 하게 하였다. 하얀 조가비에 흰 눈이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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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도 데크로드, 오른쪽은 당진화력발전소.

실눈을 뜨고 다시 싸목싸목 걸어 나간다. 매박섬 북쪽 끝에는 사자바위와 파도에 깎여 수직 기둥 모양의 암석이 된 시스텍도 여럿 보인다. 국화도로 돌아 나온다. 국화도 서쪽 바닷길로 걷는다. 암석 해안에는 데크 길이, 모래와 몽돌로 이뤄진 데는 해빈을 따라 걷도록 길이 나 있다. 그렇게 어슬렁어슬렁 걷는데 산 쪽으로 들국화 몇 송이 피어 있다. 어디에선가 불어오는 오싹한 초겨울의 비애, 추운 바닷바람을 머금고 흔들리는 들국화의 고독, 우리 연민의 눈빛으로 활짝 핀 들국화. 언제부터 누구를 기다리나. 나의 상상이 제멋대로 흐른다. 어느덧 해는 서쪽 하늘로 기울고 있다. 해안을 따라 분포된 절벽과 기암괴석은 고생대에 형성되었다 한다. 퇴적암이 지각변동으로 변화하여 생긴 변성암들이다. 그 황화 습곡과 변성 퇴적암에는 아름다운 색감을 품은 것도 있어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여러 색채가 영롱하게 비쳐 마치 무지개처럼 보이는 돌도 있다. 우리를 꿈에 잠기게 하는. 바다 북쪽으로 입파도가 보인다. 마치 부처가 바다에 누워있는 형상이다. 그 너머 제부도, 궁평항, 화성 방조제가 풍경화를 만든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서쪽으로 넘어가던 해는 바다에 반사되어 하얀 광선으로 변해 눈을 백내장으로 만들었다.

이쯤에서 눈을 한번 감는다. 망막에 잔류한 빛은 나의 내면의 빛과 어울려 새로운 빛으로 탄생한다. 모래 해변에는 습곡 침식의 자국을 가진 돌들이 이리저리 튀어나와 있어 눈이 피곤한 줄 몰랐다. 갈매기들이 먹이를 찾아 저공비행을 하는 해변은 직사광선 탓인지 겨울임에도 따뜻했다. 국화도에서 뻗어나간 육계사주에 도지섬이 있었다. 그 육계사주는 펄 흙이 아니고, 흙모래 자갈이 혼합되어 마냥 육지의 땅을 밟는 것 같았다.

바다 건너 당진 땅에는 일출 일몰을 볼 수 있는 왜목마을이 시야를 뺏는다. 왜가리의 목을 닮았다는 왜목마을, 그 해변의 백사장길. 지금도 그렇지만 한때는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유명 자자했던 왜목마을. 당신이 걷는 길이 곧 사랑이라는 그 길. 해변과 건물은 질감이 아름다운 판화처럼 눈을 끈적끈적하게 했다. 우측으로 조금 떨어져 당진 화력발전소가 유난히 클로즈업 된다. 그 큰 굴뚝에서 수증기 같은 하얀 연기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왔다. 아름답지만 이상기후가 떠오르며 마음이 어두워졌다. 저렇게 막장으로 탄소를 배출하면 그 결과가 어떻다는 걸 알고 저러는 걸까. 당진 화력발전소, 그때는 어쩔 수 없었고, 지금은 애물단지가 되었으니, 이를 어쩌나. 되돌아 국화도로 나온다. 국화도 길은 포장되었지만, 해변은 만조에 의한 푸른 파도로 은은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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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일 (시인·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우리는 아직 남아 있는 일출 전망대를 향해 가면서, 그래도 그곳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처럼 그 파란 하늘을 이고 있는 삼층짜리 정자에 올라섰다. 큰 소나무 가지가 약간 눈을 가렸지만,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환상의 뷰 포인트였다. 정말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바다와 더 먼바다와 섬들, 그 형언할 수 없는 풍경과 감동이 내 속에서 건반을 치며 높은음 자리로 올라간다. 가까운 갯벌에서 해루질하는 어느 여인의 정겨운 모습에 밀레의 만종이 연상되었다.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두 장면이 왜 자꾸 오버랩 되는 것일까. 그건 말없이 활짝 핀 두 송이 들국화처럼 순수하고 그에 따른 경건한 몰입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확장된 눈망울을 빨아들이는 저 몽환의 경치들. 그 너머 더 멀리 아득한 거기에도 시베리아 겨울 들꽃을 닮은 빨간 칸나들이 피고 있을까. 풍경은 너무 아름다워 한바탕 몽상의 꾸러미 같았다. 하늘의 안색을 살핀다.

이제 장고항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선착장에는 밀물이 들어와 국화훼리호를 주억거리게 한다. 드디어 배가 출항하고, 국화도와 매박도, 도지섬이 나의 내면에서 새로운 추억을 만든다. 트레킹은 끝없이 내다 버리고 새로운 경험을 거기에 채우는 과정일 것이다. 우리 누구나 다 익히 알 수 있는 바다와 섬, 꽃과 나무, 그리고 풍경을 나름으로 해석하여 우리 자신 속에 숨어 있는 가능성과 연결하는 것이다.

글=김찬일 시인 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유판도 여행 사진작가


☞문의 : 당진 국화도 매표소

☞내비주소 : 충남 당진시 석문면 장고항로 341(장고항 매표소)

☞트레킹 코스 : 장고항-육계사주-매박도-국화도-육계사주-도지섬-국화도-해맞이 전망대-선착장-장고항

☞인근의 볼거리 : 해식동굴, 용천굴, 왜목마을, 입파도, 신리성지, 아미미술관, 도비도 일몰, 솔뫼성지, 삽교호 해상공원, 심훈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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