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칼럼] 크레센도, 전쟁과 음악 사이

  • 곽현지 곽병원 홍보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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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1-30 06:59  |  수정 2024-01-30 07:00  |  발행일 2024-01-30 제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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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현지 곽병원 홍보계장

세계적인 지휘자 마린 알솝의 "맘껏 즐겨라"는 격려를 받으며 앳된 청년이 무대에 올라 피아노 연주를 시작한다. 그의 연주를 숨죽이며 지켜보던 관객들은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의 마지막 크레셴도 구간이 끝나자 기립박수를 치며 열광한다. 금메달을 거머쥔 소년과 경연에 참가한 피아니스트들의 공연 실황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크레센도'는 2023년 12월 개봉했다.

이 영화는 2022년 6월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열린 제16회 반 클라이번 콩쿠르의 과정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았다. 앞서 언급한 청년은 역대 최연소 우승을 차지한 18세 우리나라 천재 피아니스트 임윤찬이다. 임윤찬의 연주와 인터뷰 내용이 최근 세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냐는 질문에 청년은 '혼자 고립되어 외로운 순간 음악의 꽃을 피울 때'라고 한다. 고난도 곡이 쉽고 재미있게 들릴 만큼 그의 연주는 서사적이다. 어려운 부분을 틀리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작곡가가 이 음을 왜 여기에 두었을까 고민한 흔적, 자신이 해석한 내용을 자신감 있게 전달해내는 연주를 들으며 "하늘에 있는 예술가들을 위해 연주했다"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영화 '크레센도'의 배경이 된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동서 냉전이 치열하던 1958년 구소련에서 열린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미국인 반 클라이번이 우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소련은 예술, 문화, 과학 등 많은 분야에서 미국을 앞서고 있었는데 차이콥스키 콩쿠르 또한 자신의 문화적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개최한 대회였다. 자국 참가자가 우승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미국인 참가자가 우승하여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는데 정치적 이념과 현실에서의 갈등을 초월한 예술의 포용력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2022년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또한 러-우 전쟁 중에 개최됐다. 러시아의 출전을 보이콧한 다른 대회들과 달리 러시아의 출전을 허용하였고 영화 '크레센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참가자들이 서로 우정을 나누는 모습을 담아냈다. 우크라이나 연주자 드미트리 초니는 자신의 연주가 어두운 시대에 치유의 역할을 하기 바란다고 말한다. 러시아 연주자 안나 게뉴셰네는 준준결승 무대에서 우크라이나 전통 의상을 입고 피아노를 연주한다. 데뷔 전인 어린 신인들이지만 예술가로서 사명에 대해 각자의 철학이 깊다.

안나와 드미트리가 나란히 은메달과 동메달을 수상하며 서로 포옹하는 모습은 극적이다. 음악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는 없지만 그들의 연주는 세상을 향해 평화를 외치는 절절한 마음을 마주하게 한다. 전쟁 당사국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주변국에게도 각자의, 그리고 공통의 울림을 준다. 이들의 연주는 개인의 감정을 넘어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예술은 단순히 우리에게 먹고사는 문제, 답답한 현실을 잊고 낭만적인 희망을 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현실 한가운데서 예술의 언어로 우리를 위로해준다. 마치 일제 식민 통치 때 시인 윤동주가 '서시(序詩)' '별 헤는 밤'과 같은 작품으로 시대의 아픔을 위로해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크레센도' 확장판이 내일(1월31일) 개봉한다. 고인(故人)이 된 작곡가들이 악보 위에 수놓고 싶었던 메시지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연주가 일상에 지친 우리의 마음 또한 위로해 주리라 믿는다.

곽현지 (곽병원 홍보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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