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상] 안녕, 나의 모자여!

  • 우광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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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2-29 07:01  |  수정 2024-02-29 07:01  |  발행일 2024-02-29 제22면
20년 아꼈던 모자를 버렸다
나에게 상징과도 같은 물건
영화 마스크 속 가면처럼
해방된 공간서 노니는 나를
나의 모자와 함께 꿈꿨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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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광훈 소설가

지난주 토요일, 애착인형처럼 아끼던 모자와 헤어졌다. 20여 년 전, 이마트 만촌점 골프매장에서 구입했던 검은색 나이키 에어로빌 모자. 이월 특가상품이라 가격이 채 2만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골프인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 있던 제품이었다.

골프를 특별히 좋아한다거나 나이키란 메이커를 선호해서 그 모자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마트에 진열된 무수한 제품 중 유일하게 내 머리 크기에 맞는 모자였기 때문이다. 사실 난 두상이 유별나게 커서 모자는 '쓴다'라는 표현보다는 '걸친다'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정도였다. 모자가게만 발견하면 항상 희망을 품고 들어서 보지만 "아저씨 머리에 맞는 모자는 우리 가게엔 없는 것 같네요…"라는 절망적인 답변만이 되풀이될 뿐이었다. 이 나이키 모자는 그런 난관을 극복하고 나에게로 찾아온 몇 안 되는 보물이었던 셈이다. 그런 소중한 보물과 헤어져야만 했다니….

그날은 아내랑 기차여행을 약속한 날이었다. 배낭을 둘러메고 운동화를 신으려 할 때쯤, "당신 모자 이제 버려야 할 것 같은데. 색이 많이 바랜 것 같아"라고 아내가 말했다. 물론 난 몇 달 전부터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 낡고 빛바램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이 정도면 아직 쓸 만해"라고 답하자 아내는 예상외로 단호했다. "여보, 이런 모자 쓰고 다니면 사람이 허름해 보여. 나이가 들수록 깔끔하게 갖춰 입어야 어디 가도 대접받을 수 있다고. 당신이 못 버리겠으면 내가 도와줄게"라며 내가 들고 있던 모자를 빼앗아 쓰레기통 속에 넣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타살도 자살도 아닌, 소멸의 순간이었다. 아내의 매정함에 난 눈물이 핑 돌았다.

안녕, 나의 모자여!

사실, 모자는 나에게 교사와 소설가, 질서와 무질서, 현실과 이상, 구속과 해방을 경계 짓는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었다. 난 문학과 관련된 모임이나 행사에 참석할 때면 항상 모자를 썼다. 포털사이트에서 검색되는 문학 관련 프로필 사진 역시 모자 쓴 모습이 대부분이다. 이렇듯 모자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나를 능동적이고 외향적으로 변화시켜주는 묘한 힘이 있었다. 영화 '마스크(The Mask, 1994)'에 등장하는 스탠리 입키스(짐 캐리 扮)의 가면처럼 말이다.

강에서 우연히 발견한 가면을 통해 그동안 억눌러왔던 자신의 어두운 본성을 거침없이 발산하는 스탠리의 모습은 현대인들의 위선과 나약함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광장에서의 삶은 인간 내면에 실재하는 욕망과 광기 그리고 폭력성을 은폐하고, 따라 우린 밀실 같은 은밀한 곳에서만 추악한 마성의 기운들을 한껏 토해내며 그 배설의 흔적들을 서정 어린 눈빛으로 위무한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 나오는 표현처럼 온전한 인간의 삶은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을 반드시 포함하며, 따라 푸른 광장과 어두운 밀실의 조화로운 공존 없이는 그 누구도 평화롭게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모자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모자를 쓰는 순간, 난 낯선 공간에 들어선 여행자마냥 한껏 들뜬 표정으로 새로운 모험을 강행한다. 아무런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이, 마치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과 마주한 파우스트 박사처럼 말이다. 그렇게 현실의 지옥에서 벗어나 가슴 벅찬 신세계와 조우하는 순간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획일적이고 윤리적이며 수동적인 나가 아니라, 창의적이고 불온하며 능동적인 나를. 갇힌 공간이 아니라 해방된 공간 속에서 자유로이 노니는 나를, 나는 나의 모자와 함께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우광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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