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남산동, 이야기를 입히자

  • 이효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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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3-05 08:39  |  수정 2024-03-05 08:59  |  발행일 2024-03-05 제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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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열(시인·대구문화관광 해설사 회장)


조선시대부터 대구 중심부를 형성하고 있는 대표적 원도심인 남산동. 일제 강점기인 1914년 남산정(南山町)에서 1949년 남산동으로, 1951년엔 대구시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남산동을 돌아보는 첫걸음은 명덕로터리가 좋겠다. 달서구 두류동으로 옮긴 2·28 민주의거기념탑은 1960년 2월28일 선거부정에 맞서 민주의 횃불을 높이 든 학생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김윤식 시인은 '아직은 체념할 수 없는 까닭'이라는 시에서 "보라. 스크럼의 행진!/ 의를 위하여 두려움이 없는 10대의 모습,/ 쌓이고 쌓인 해묵은 치정 같은 구토의 고함소리/ 허옇게 뿌려진 책들이 짓밟히고/ 그 깨끗한 지성을 간직한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리고…"라고 노래했다. 로터리 부근 2·28민주운동기념회관에 가면 그날의 뜨거운 함성과 대구의 자랑스러운 민주운동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명덕초등학교 강당 자리에는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 전태일이 다녔던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던 청옥공민학교가 있었다. 성유스티노 신학교 입구 길에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며 산화한, 기와지붕이 삭아 당장 허물어질 것 같지만 아무도 관심 없는 전태일이 살던 옛집이 있다. 그리고 명덕초등학교 복도에는 대구가 낳은 근대미술의 천재화가 이인성의 1942년 작 사과나무 그림이 걸려 있었다.

남문시장을 지나다 보면 문우관과 상덕사 비각이 있다. 문우관은 군자는 글로 벗을 모으고 벗으로 인을 돕는다는 말에서 따왔는데, 한일합방 후 낙육제와 양사제가 폐허가 되자 선비들을 모아 강학할 장소로 설립된 곳이다. 이숙과 유척기의 상덕사 비각은 기호지방의 서인 두 분이 남인의 본거지에서 베푼 목민관으로서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당파를 초월하여 주민과 유림들이 함께 건립한 것이다.

남산동 지금의 동부교육지원청 자리는 기생 출신의 김울산 여사가 1910년 대구복명공립학교를 세운 곳이다. 6·25 때는 상화 이상화와 고월 이장희 시인의 호 앞자리 이름을 딴 상고예술학원이 들어섰다. 당시 김동리, 이은상, 구상, 조지훈, 박목월, 마해송, 백기만, 이효상, 김사엽, 서동진 등 90여 명의 대단히 화려한 운영진이 참가한 학원이었으며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이육사 고택 부근에는 독립투사이자 시인인 이육사기념관이 있고, 성유스티노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계산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김수환 추기경, 최근 재조명되고 있는 근대연극 연출가 홍해성, 친일 전력에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을 지낸 '그 집 앞' '고향생각' '희망의 나라로' 등을 작곡한 현제명,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와 근현대사에서 역동적인 삶의 궤적을 그리며 조양회관을 건축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동암(東庵) 서상일도 남산동 출신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 유한준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고 했다. 따뜻한 마음의 눈길로 남산동을 걷다 보면 진정 대구의 속살이 보일 것이고 내가 사는 대구 땅 어느 곳 하나 문화의 향기와 정취가 서리지 않은 곳이 있으랴.
이무열(시인·대구문화관광 해설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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