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상] 피아노 학원 발표회서 마주친 어느 조손 가정

  • 정혜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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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3-07 07:02  |  수정 2024-03-07 07:02  |  발행일 2024-03-07 제22면
학원 발표회 혼자 온 할머니
중 2 손자 연주 보면서 눈물
남들은 흥겨운데 서러운 날
살다보면 한번쯤 겪기 마련
음악이 그 애 위로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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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진 변호사

3월 개학 직전 토요일엔 내가 다니는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발표회가 있었다. 학원생들이 지난 1년간 연습한 곡 중 하나를 선택해 연주한다. '연주'라고 했지만 사실은 '재롱잔치'에 가깝다. 부모들의 입장에서는 아이의 성장을 확인하고 격려해주는 날이고, 학원 입장에서는 고객들인 학부모들을 초대해 나름의 성과를 보여주는 홍보의 자리다.

그 학원의 거의 유일한 성인 수강생인 나는 재롱을 떨 나이도 아니고 중년 자녀의 재롱을 받아줄 부모님도 안 계시지만, 발표회 프로그램 구색 맞추기 차원에서 참가해 제일 먼저 순서를 마치고 구석진 자리에서 마음 편하게 발표회를 감상했다. 평소 그랜드피아노가 놓인 곳이 무대이고, 그 앞으로 문 입구까지 서너 줄로 의자를 놓았는데 의자는 일찍부터 꽉 찼고 서 있는 학부모들도 많았다. 그리 넓지 않은 학원에서 설 자리도 확보하지 못한 이들이 복도까지 서 있었다. 관객들을 죽 훑어보다가 어떤 할머니 한 분에게 눈길이 갔다. 대개 부모가 같이 오거나 부모 중 한 명만 온 경우에는 다른 자녀나 친한 친구 등 함께 온 경우가 많은데 유독 그 할머니는 혼자였다. 다들 약간은 상기되고 들뜬 얼굴인데 할머니는 매우 긴장된 표정으로 가끔씩 마른 침을 삼키고 있었다.

'혹시, 어제 본 그 애 할머니?' 발표회 전날 발표곡 마지막 점검을 받기 위해 학원에 갔을 때 마침 지도를 받고 있던 중학생 남자아이가 있었다. 피아노는 꽤 잘 치는 편이었는데 태도가 좀 시큰둥해 보였다. "○○야, 틀려도 괜찮으니까 자신있게 쳐. 틀린 데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지 말고 안 틀린 척하고 계속 치면 돼. 알았지? 그리고 내일은 제발 추리닝 입지 마. 교복 단정하게 입고 와야 해." 남자애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는지 대답을 하지도 않고 짐을 챙기고 신발을 신었다. 학원 문을 나서는 애 뒤통수를 향해 선생님은 다시 소리를 쳤다. "꼭 교복 입고 와."

내가 지나가는 말로 "쟤, 중2병인가 봐요?" 했더니 선생님이 정색을 한다. "쟤, 엄청 많이 좋아진 거예요. 부모가 이혼하고 할머니랑 둘이 살아요. 수업료는 아버님이 매달 보내 주시는데…. 되게 불안한 애였는데, 음악을 좋아해서 학원에 열심히는 나오거든요."

그 할머니가 눈에 들어온 때부터 나는 그 애 순서만 기다렸다. 걔는 다행히(?)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 나왔다. 다른 애들 때와 달리, 그 애가 연주할 때 폰으로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찍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는 처음에는 그 애가 피아노 치는 걸 애틋한 눈빛으로 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던 할머니는 손자 연주가 끝났을 때에도 끝내 고개를 들지 못하고 훌쩍이고 계셨다. 나는 연주를 마치고 인사하는 그 애를 향해 환호성을 지르고 손바닥이 불이 날 것처럼 박수를 쳤다. 그 애는 할머니를 봤을까? 아이는 대기실로 갔고, 할머니는 다음 순서가 되자 조용히 자리를 뜨셨다.

남들은 다 흥겨워하는 날인데 나만 서러운 그런 날이 있다. 남들이 즐거워한다는 사실이 나의 서러움을 더 크게 만든다. 상황은 다 다르지만 살다 보면 그런 날을 누구나 한 번쯤 겪기 마련이라는 걸 그 애도 크면 알게 되겠지. 지금처럼 음악이 그 애에게 위로가 되기를, 내년 이맘때 그 애와 할머니를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정혜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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