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레이더] 어부지리도 능력

  • 전유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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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3-27 07:57  |  수정 2024-03-27 08:02  |  발행일 2024-03-27 제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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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유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

일본의 석유화학산업은 우리나라와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 원유 및 천연가스 등 원료를 전량 해외 수입에 의존한다는 점, 납사 기반 석유화학 콤플렉스로 구성돼 있다는 점, 중국의 자급률 상승 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1990년대부터 구조조정을 시작해 매출액이나 시장 점유율 측면에서 글로벌 top-tier 업체로서의 입지를 확실하게 다졌다는 점에서 국내 화학업체들 상황과는 대조된다.

이에 3월9~11일 일본 도쿄를 방문, 주요 화학업체들과 미팅을 했다. 일본 석유화학 산업 경쟁력을 훼손시켰던 요인, 지난 30년간 취한 전략 그리고 그 결과로 현 상황은 어떠한지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이번에 만난 회사는 정유사(이데미츠 코산), 석유화학(미쓰비시 케미칼, 스미토모 케미칼, 미츠이 케미칼), 소재 관련 기업(도레이, 미쓰비시 가스 케미칼) 등 총 6개사다.

일본 경쟁력이 약화된 것은 소규모 다수 설비가 난립하는 구조, 의존도가 높은 내수시장 침체, 중동과 아시아 증설 러시, 오일쇼크 등 총 4가지다. 이 중 중국을 중심으로 한 증설 러시는 국내 석유화학 산업에도 위협요인이 되고 있다.

일본은 두 차례 오일쇼크와 내수시장 침체로 경쟁력이 약화되자 1980년대부터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2000년대 아시아와 중동 증설 사이클에 접어들면서 본격화됐다. 구조조정과정에서 일본이 취한 전략은 크게 범용 부문 통폐합, 내수 축소 및 수출 확대, 해외 직접진출, 포트폴리오 고부가화이다. 특히 해외진출은 동남아 현지수요 대응 및 산유국에서 저렴한 원료 확보에 초점이 맞춰졌다.

1990년대에 해외시장 진출에 나선 일본 석유화학 업체들은 중국보다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에 집중했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엔고현상으로 일본 자동차 및 전기전자 업체들이 동남아로 설비를 이전하자, 동반 이동했던 영향이 가장 컸다.

당시 동남아 진출은 일종의 '어부지리'일 수 있지만, 결과적으론 분명 새로운 기회의 여건이 되고 있다. 미국-중국(G2) 정치적 갈등이 2018년 이후 7년째 장기화하며 미국은 중국을 배제한 글로벌 공급망 재구축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다.

기존 중국이 맡았던 역할은 아세안 국가들로 점점 이전될 것이다. 아세안 내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생산설비 인프라를 확보해 온 일본 석유화학업체들은 판매처가 한층 더 확대되는 셈이다.

이번 탐방에서 6개사에 최근 국제정세를 바라보는 시각과 향후 사업계획을 공통 질의했다. 일부는 이미 동남아 또는 북미 진출을 확대하고 있다고 했고, 또 다른 일부는 진출을 검토 중이었다. G2국가 간 갈등 속에 얻어걸린 여건일 수는 있지만, 이 또한 구조조정이 이뤄낸 결과다. 어부지리도 능력인 셈이다.

더욱이 지금 마주한 이 상황을 새로운 기회로 삼아 적극적으로 활용 및 대응하려는 일본 석유화학 업체들의 움직임이 인상적이었다.

일본 대비 제품 포트폴리오는 물론 생산처와 판매처 다변화가 더딘 국내 화학 업체들에 현 시황은 더 혹독하다. 국내 업체들은 범용부문 조정이나 동남아 등 신규시장 확대엔 소극적이다. 여건이 다른 만큼 무조건 일본 사례를 따라갈 순 없다.

하지만 일본의 구조조정과 이에 따른 어부지리로라도 발생한 새로운 성장의 기회를 적극 활용하는 전략은 한 번쯤 진지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전유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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