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과 창] 투표할 권리, 기권할 권리

  • 서승완 유메타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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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4-10 07:01  |  수정 2024-04-10 07:02  |  발행일 2024-04-10 제26면
일부국가의 강제투표제는
유권자 신중한 선택 방해돼
성숙한 민주주의가 되려면
기권할 권리도 존중하면서
자발적 투표참여 독려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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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완 유메타랩 대표

필자가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 주말에 한 일본인 지인과 함께 지역 행정기관 앞을 지난 적이 있었다. 당시 기관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고, 사람들은 대부분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인 지인은 그 광경을 두고 '무료 나눔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라 추측했지만, 알고 보니 그날은 일본의 선거 투표일이었다. 정치에 무관심한 일본인들의 단면을 보여주는 일화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일본은 개인 투표율이 매우 저조한 국가 중 하나다. '투표는 국민의 의무'라며 투표율 제고를 위한 캠페인이 활발히 전개되는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물론 일본의 낮은 투표율을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필자의 경험은 투표를 둘러싼 다양한 의견들을 고민하게 만든다.

민주주의는 일반 시민의 정치 참여를 통해 지탱되는 제도다. 이렇게 시민의 정치 참여를 보장하는 권리를 '참정권'이라 부른다. 우리는 흔히 참정권을 단순히 '투표할 권리'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참정권의 개념은 이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투표권은 물론이고 피선거권,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 다양한 권리가 참정권의 범주에 포함된다. 물론 이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이고 본질적인 참정권의 행사 방식은 단연 투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투표가 다른 정치 참여와는 별개로 구분되는 일종의 '의무'라고까지 볼 수 있을까?

필자는 투표권과 함께 '기권할 권리' 역시 참정권의 중요한 일부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에 기반하지만, 동시에 소수 의견을 포함한 모든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핵심이다. 어떤 유권자가 선호하는 후보를 찾지 못해 기권표를 던진다면, 이는 단순히 투표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대변해줄 후보가 없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흔히 '최악보다는 차악을 선택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선택을 하는 것이야말로 국민의 대의를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투표를 법적 의무로 규정하는 강제투표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이러한 의무 투표는 유권자들의 신중한 선택을 방해할 수 있다. 선거 이슈에 관심이 없거나 후보자에 대해 잘 모르는 유권자들까지 무조건 투표장으로 내몰 경우, 충분한 고민 없이 섣부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 투표율을 높이는 것 같지만, 민주주의의 질적 향상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셈이다. 이렇듯 맹목적인 투표 참여보다는 유권자 스스로가 선거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자신의 의견을 신중하게 표현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는 것이 더욱 긴요하다. 투표는 단순한 동원이 아니라 주권자로서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정치 참여가 되어야 한다. 유권자 개개인이 신중하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 그것이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길이다.

물론 우리는 투표의 소중함도 잊지 말아야 한다. 투표는 주권자인 국민이 대의 민주제의 근간을 이루는 선거에 직접 참여하는 행위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기권할 권리를 존중하되, 다른 한편으로는 유권자들의 정치의식을 높이고 자발적 투표 참여를 독려해야 한다. 투표권과 기권할 권리, 이 두 권리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온전해질 수 있다. 4월10일, 오늘은 국회의원 선거 투표일이다. 우리 사회가 참정권의 온전한 가치를 인식하고, 투표의 소중함을 잊지 않으면서도 기권의 의미 또한 존중하는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서승완 유메타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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