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교육] 몬스터 콜스

  • 정재걸 대구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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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4-15 08:00  |  수정 2024-04-15 08:01  |  발행일 2024-04-15 제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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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걸 대구교대 명예교수

'몬스터 콜스'는 국제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받은 '몬스터콜'이라는 영화의 원작이다. 이 책은 영국의 작가 시본 도우드가 작품을 구상하고, 그녀의 사후에 패트릭 네스가 완성한 청소년 소설이다. 영국도서관협회에서 가장 우수한 동화에 부여하는 카네기상과 또 가장 뛰어난 그림책에 부여하는 케이트 그리너웨이 상을 동시에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책의 내용은 결코 청소년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여기 코너 오말리라는 한 소년이 있다. 코너는 다섯 살 때 부모가 이혼했고 현재 말기 암 환자인 엄마와 살고 있다. 아빠는 이혼 후 미국으로 건너가 새 가정을 꾸렸고, 엄마의 병세는 점점 악화된다. 코너는 매일 밤 악몽을 꾼다. 절벽에 매달린 엄마의 손을 놓치는 꿈을 꾼다. 반복되는 악몽에 시달리는 코너에게 어느 날 밤 주목나무 몬스터가 찾아온다. 몬스터는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하고, 마지막 네 번째 이야기는 코너가 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몬스터의 이야기를 듣고 코너는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최악의 상황인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자 코너의 마음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온다.

몇 년 전 업무 수행 중 잘못된 결정으로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교수가 있었다. 그는 징계위원회에서 중징계를 받고 나자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나에게 말했다. 정말로 고통스러웠던 것은 징계를 기다리는 내내 마음속에서 일어난 불안과 두려움이었는데 막상 징계가 결정되자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져 버렸다. 불안과 두려움은 이미 일어난 일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요즘 버스를 타면 '감사합니다' 혹은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보다는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더 자주 듣게 된다. 노인 인구가 점점 늘어가고 있음을 버스 검표기가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노인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존재다.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표가 바로 노인 자살률이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세계에서 매우 높은 편이지만 특히 노인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의 평균 자살률보다 압도적으로 높다.

우리 사회에서 노인이 된다는 것은 현대문명의 측면에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현대문명에서 노동은 자아정체성의 형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를 차지한다. 따라서 노동에서 소외된 노인은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진다. 또 현대문명에서 욕망 충족은 삶의 가장 중요한 활력소가 된다. 돈이 많은 사람, 큰 권력을 가진 사람,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 멋진 외모를 가진 사람이 바로 욕망 충족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런 관점에서 노인은 무력한 존재일 뿐이다. 또 현대문명에서 인간은 모두 분리 독립된 개별적 존재이기에 죽음은 이 세상과의 근원적인 분리를 뜻한다. 죽음이란 자신의 존재가 무로 돌아가는 것이고 나이 들어감이란 자신의 존재가 점점 더 무에 가까워지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최악의 상황은 오히려 진정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그 상황은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그것을 일어나기 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 되돌릴 수 없다는 최악의 상황은 우리에게 최선의 선물을 제공한다. 그 최선의 선물이 바로 자유다. 노년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는 그 상황을 예상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유란 그러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남이다. 노년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면 나는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두려움은 무지로부터 오는데 그 최악의 상황이 벌어짐으로써 더는 무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나는 텅 빈 공간이고 빈 스크린이다. 그 빈 공간과 스크린에 온갖 영상과 소리와 생각이 드러난다. 진정한 나는 텅 빈 공간인 동시에 그런 감각과 감정과 생각이 일어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공간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생각은 분리될 수 없다. 그 모든 것을 포함한 공간이 바로 나인 것이다. 노년은 감정과 생각이 죽음과 함께 끝날 것을 깨닫는 동시에 진정한 나는 죽지 않음을 깨닫는 시기이다.

우리 사회의 노인들이 직면한 '되돌릴 수 없음'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바로 분리 독립된 개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모든 존재와 근원적으로 하나인 존재임을 자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한다. 유학의 궁극적인 경지인 성인(聖人), 불교의 부처, 도가의 진인(眞人)은 모두 분리 독립된 개체로서의 자아에서 벗어난 존재를 말한다.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우리나라의 노인은 그런 측면에서 가장 자유로운 존재로 거듭날 가능성이 가장 큰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대구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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