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완 칼럼] 만기친람의 역설

  • 박규완
  • |
  • 입력 2024-05-02 07:03  |  수정 2024-05-02 07:04  |  발행일 2024-05-02 제22면
권한 위임하고 책임 물어야
R&D 예산·의대 증원이 교훈
숫자 집착하면 '좁쌀 정치'
대통령 思惟 광대무변해야
밑그림 그리고 방향 제시만

2024050101000051800001561
논설위원

만기친람(萬機親覽). 임금이 모든 정사를 친히 보살핀다는 뜻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일견 긍정적이다. 하지만 만기친람은 양가적(兩價的)이며 현대에선 외려 부정적 평가가 많다. 만기친람의 원조 격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도 지시사항이 1만자가 넘을 정도로 세세하고 꼼꼼하게 국정을 챙겼다. 좋게 봐주면 '깨알 리더십'인데 살짝 비틀면 '좁쌀 정치'로 폄훼된다. 대통령이 너무 세밀한 부분까지 챙기다 보면 큰 틀에서의 방향 제시와 갈등 조정을 간과할 수 있다는 우려의 발로일 게다.

지난달 2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국민의힘 낙선·낙천자 위로 오찬. 낙선·낙천자들은 윤석열 대통령 면전에서 불만과 원망을 쏟아냈다. "장관에 책임 맡기고 잘못하면 책임 물어 경질하라" "대통령이 정책의 구체적이고 세세한 사안까지 간섭해선 안 된다". 권한 위임하고 책임 묻고 만기친람하지 말라는 주문이다. 기실 윤 대통령의 권한 위임은 애매모호했으며 친윤 관료와 이너서클의 책임 추궁엔 유독 관대했다. 159명이 죽은 이태원 참사에도 행안부 장관과 경찰청장은 건재했다. '행정안전부 장관이 재난 및 안전을 총괄·조정한다'고 명시된 재난안전법이 버젓한데도.

R&D 예산 삭감엔 만기친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지난해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윤 대통령이 "R&D 사업을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하라"고 지시하며 33년 만에 R&D 예산 16.6%가 삭감됐다. 그 불똥은 대학원생 연구원 등 약한 고리에 주로 튀었다. 과학계의 반발과 여론 질타가 비등하자 정부는 올핸 다시 R&D 예산 대폭 증액으로 방향을 틀었다. 대통령 한 마디에 괜한 소동을 치르며 정책 일관성에 흠집만 남겼다. "과학계의 오랜 관행과 부조리를 개선하라"는 식의 원론적이고 포괄적 지시가 대통령 언어로서는 차라리 합당했을 듯싶다.

의대 증원 역시 대통령이 2천명을 못 박을 일이 아니었다. 국민여론도 의대 증원엔 공감했지만 2천명 고수엔 반대 의견이 더 많았다. 2천명 증원이 금과옥조가 아니거늘 윤 대통령은 2천명을 교조(敎條)처럼 반복했다. SNS엔 무속인 천공의 본명이 '이천공'이어서 2천명에 집착한다는 낭설이 떠돌았다. 대통령이 구체적 수치까지 제시하면 해당 부서의 재량과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민생토론회도 웬만하면 장관에게 맡겨야 한다. 차라리 그 시간에 국정 운영의 큰 틀을 고심하고 야당 의원들 만나고 기자회견 하는 게 통치자의 진면목이다. 총선 전 24회의 민생토론회에서 윤 대통령이 약속한 정책 중 입법사안은 거야의 벽에 막힐 공산이 크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임 100일 간담회에서 "신(神)이 나에게 하루 48시간을 주셨으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텐데"라고 말했다. 하루를 48시간 쓰는 방법이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다. 존 맥스웰도 저서 '리더십의 21가지 불변의 법칙'에서 "권한을 위임하고 간부와 직원들의 역량을 키워주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통치자의 사유(思惟)는 넓을수록 좋다. 장자(莊子)의 언어 광대무변(廣大無邊)이면 금상첨화다. 대통령은 밑그림만 그리고 디테일은 실무진에 일임하는 게 옳다. 굳이 만기친람하고 싶다면 외교 쪽으로 눈을 돌려라. 예컨대 라임 지분을 넘기라고 압박하는 일본 정부에 대한 대응이라면 외교부나 주일 대사관보다 대통령의 말에 더 무게가 실릴 테니까.
논설위원

기자 이미지

박규완 기자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