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완 칼럼] 보수정권의 부박한 정책들

  • 박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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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5-30  |  수정 2024-05-30 07:00  |  발행일 2024-05-30 제22면
에드먼드 버크, 보수 정체성

'전통·질서·점진주의'로 규정

尹정부 정책 급조-철회 반복

즉흥적이며 조변석개 사조

뚝배기마냥 진득·우직해야

[박규완 칼럼] 보수정권의 부박한 정책들
논설위원

3일 천하. 갑신정변 서사가 아니다. 해외직구 금지 얘기다. 정부는 KC(국가통합인증마크) 미인증 제품에 대한 해외직구 금지 조치를 사흘 만에 철회했다. 알리·테무·쉬인 등 중국 e커머스의 국내 공습을 겨냥한 규제조치가 소비자 선택권 제한과 규제 실효성 논란에 휩싸이면서다. 해외직구 정책은 소비자 권익, 국민안전, 우리기업 보호와 경쟁력 강화를 조화롭게 살펴야 하는데 정부 대책은 투박하고 그악스러웠다. 하루 수십만 건의 해외직구 KC 인증 여부는 또 어떻게 걸러내겠다는 건지…. 유승민 전 의원은 "무식한 정책"이라 직격했고, 야당은 "현대판 쇄국정책"으로 폄하했다.

'1일 천하'도 있다. 고령자 조건부 운전면허 검토는 정부 발표 하루 만에 번복됐다. 단지 나이를 기준으로 면허를 제한하겠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면허 조건으로 내건 야간 고속도로 운행 금지, 속도 제한도 현실과 동떨어지긴 마찬가지다. 2년 전 '5세 취학' 소동을 벌써 잊었나. 전 국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거시교육정책을 갓 취임한 장관이 로드맵까지 제시했다. 여론 수렴 과정도 없이. 5세 초등 입학이 경제활동인구와 노동기간을 늘린다나.

송나라 왕안석이 설계한 개혁정책이자 부국강병책 '희녕변법'은 청묘법·시역법·균수법 등 농민과 중소상인을 지원하는 내용을 고루 담았다. 명실공히 친서민 정책이다. 하지만 희녕변법 시행 후 민생은 더 피폐해졌고 결국 실패로 끝났다. 시장의 자율기능과 경제현장의 복잡다단한 메커니즘을 도외시한 까닭이다. 공론화와 숙성의 시간을 거치지 않은 급진개혁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입학사정관 제도는 십수 년의 찬반 토론을 거치고서야 안착됐다. 의대 정원 확대는 정부와 이해당사자 간의 숙론(熟論)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윤석열 정부에서 급조된 정책을 내놨다가 여론에 밀려 철회·번복을 되풀이한 사례는 차고 넘친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R&D(연구·개발) 예산이 대폭 삭감되더니만 올해는 R&D 예타 면제까지 추진한다니 도통 종잡기 어렵다. 보수의 이론적 기초를 세운 18세기 영국 정치학자 에드먼드 버크는 보수주의의 원조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보수의 정체성을 '전통주의, 질서주의, 점진주의'라고 규정했다. 윤 정부는 어떤가. 시류에 영합하거나 조변석개의 정책 사조(思潮)는 전혀 보수정권답지 않다.

김포 등지를 서울에 편입하는 '메가 서울' 프로젝트는 국토균형발전, 지방소멸 등 시대적 과제와 함께 논의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총선 표심을 노린 여당 대표가 불쑥 던지면서 분란만 일으켰다. 국민의힘 소속 유정복 인천시장의 강력한 반대는 사전 조율이 없었다는 방증이다. '목련꽃' 피기 전 급조됐던 만큼 '메가 서울' 구상이 총선 후 유야무야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윤석열 정부는 보수정권인데도 도무지 진득한 맛이 없다. 정책은 즉흥적이고 부박(浮薄)하다. 현장의 메커니즘과 실상을 외면하며 쉽게 공론화 과정을 건너뛴다. '소설을 시처럼 쓰라'는 말이 있다. 정성과 시간을 들이라는 뜻이다. 윤 정부는 시를 소설처럼 쓰듯 설익은 정책을 남발한다. 암묵적 질서와 일관성마저 팽개친다. 은근한 뚝배기여야 하는데 흡사 양은냄비다. 정부 정책도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검프(톰 행크스) 같은 우직한 DNA가 필요하다. 졸갑증과 단기적 안목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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