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배신의 상처는 무엇으로 치유되는가

  • 이찬희 법무법인 율촌 고문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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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7-15  |  수정 2024-07-15 07:06  |  발행일 2024-07-15 제22면
연인 배신의 충격과 슬픔

남자의 눈물, 깊은 상처

인류 역사 속 배신 사례

헌법과 신뢰의 중요성

사랑으로 상처 치유하다

[아침을 열며] 배신의 상처는 무엇으로 치유되는가
이찬희 법무법인 율촌 고문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죽이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말하곤 안경테 너머 선해 보이는 눈매에 눈물이 글썽거린다. 연이어 "죽고 싶다"면서 마침내 폭풍 같은 눈물을 쏟아낸다. 상담자는 저명한 대학교수로서, 필자는 그를 오래전부터 잘 안다. 수십 년 변호사 생활 중 살인과 자살의 동시 상담은 처음 맞이하는 경험인지라 당황스러웠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던 그를 이처럼 극단의 수렁으로 몰아넣은 것은 사랑하는 연인의 배신이다.

상담자는 인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연인이 있었다. 세상 모든 만남에 완벽이란 있을 수 없다. 살아온 시간과 환경의 차이 때문에 간격이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메꿔 나가느냐이다. 언제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원했던 그녀에게 상담자는 너무 바쁜 사람이었다. 그로 인해 그녀는 외로움을 참지 못하고 헤어지자고 말했다.

남자는 평소 그녀와 나누었던 수많은 약속을 생각하며 이별 통보를 진심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시간을 가지면서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애타게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술 한잔 마시고 너무 보고 싶어 그녀의 집을 찾았다.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알려주었던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이전에도 술 한잔 마신 늦은 밤에 그녀의 집을 찾아갔던 적이 종종 있었다. 그날도 그랬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늦은 밤이었음에도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인기척에 그녀가 당황하며 현관으로 뛰어나왔다. 직감적으로 다른 남자가 있음을 느꼈다. 잠긴 방문을 두드리며 소리치니 누군가 나왔는데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단다. 바로 자신이 친동생보다 더 믿고 아끼던 후배였다.

후배는 피부과 의사였는데 아름다운 그녀의 피부관리를 위해 상담자가 소개하고 골프도 같이 치러 다닐 정도로 믿었다. 그는 하룻밤에 자신의 인생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았던 두 명으로부터 배신당한 것이다. 남자도 이렇게 울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통곡하는 그를 위로해줄 말이 딱히 없었다. 변호사만 아니었으면 그가 느꼈을 배신감을 생각하니 "그냥 죽여버리세요"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천벌 받을 테니 마음속으로 실컷 저주하며 관계를 정리하라고 조언하였다.

상담이 끝나고 며칠 동안 '배신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돈 몇 푼에 예수를 팔아넘긴 가룟 유다, 공화정이라는 정치적 신념 때문에 카이사르를 칼로 찌른 브루투스를 비롯하여 배신은 인류의 역사에 수없이 등장한다. 남녀 간의 사랑을 포함하여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은 신뢰이다. 배신은 신뢰를 짓밟는 짓이다.

법률 역시 신뢰를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가치로 생각한다. 우리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과 의무는 국가와의 신뢰를 전제로 한다. 민법 제2조도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대상이 개인이냐 국가냐의 차이는 있지만 형법상의 배임, 횡령, 사기 같은 범죄는 물론이고, 내란죄나 간첩죄 같은 국가적 법익에 관한 범죄 역시 신뢰를 지키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 판례에도 신뢰보호의 원칙은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며칠이 지난 후 걱정스러워 상담자에게 전화를 했다. 목소리가 여전히 무척이나 힘겹다. 괜찮냐는 물음에 깊은 한숨과 함께 대답한다. "그래도 그녀를 사랑합니다." 사랑의 힘이 참 놀랍기만 하다. 칼로 벤 육체의 상처보다 더 아픈, 배신으로 할퀸 마음의 상처는 무엇으로 치유될 수 있을까. 정답은 사랑이다. 그런 사랑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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